정한모 시인님의 시 '가을에'를 만납니다. 오늘날 우리네 삶의 순수를 훼손하고 지배하는 것들을 돌아보며 묵상하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한모 시 '가을에' 읽기
가을에
정한모(1923~1991, 충남 부여)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가볍게 가을을 나르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오늘이
마침내 전설(傳設)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眞理) 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그 속력(速力)으로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眞理)라는
이 무서운 진리(眞理)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정한모 시집 「여백(餘白)을 위한 서정(抒情)」(신구문화사, 1959년) 중에서.
정한모 시인님(1923~1991, 충남 부여)은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시 '멸입(滅入)' 가작)를 통해 등단했고, 첫 시집 「카오스의 사족(蛇足)」(1958년)을 비롯 「여백(餘白)을 위한 서정(抒情)」, 「아가의 방」, 「새벽」, 「사랑 시편(詩篇)」, 「아가의 방 별사(別詞)」, 「나비의 여행」, 「원점에 서서」 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서울대 교수(국어국문학과), 문화공보부 장관 등을 역임했습니다. 문화공보부 장관 때 '납북 월북 문인 해금조치'를 처음으로 입안, 공포했습니다.
2. 이 세계를 떠받쳐 나가는 것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정한모 시인님의 시 '가을에'는 1959년 발간된 시인님의 두 번째 시집 「여백(餘白)을 위한 서정(抒情)」에 실린 작품입니다.
시인님 36세 즈음이네요.
도서관에서 귀중본으로 보관 중인 이 시집을 빌려 펼쳐보니, 시인님은 이 시 '가을에'를 시집의 첫 번째 시로 올려놓았네요. 그만큼 소중히 여기는 시라는 시인님의 눈짓이겠지요?
오늘은 이 오래된 시집에 실린 활자 표기 그대로 옮긴 시를 감상합니다. 다만 원본의 '나무잎'은 '나뭇잎'으로 수정했습니다.
기도 형식의 시입니다. 1 연부터 만나봅니다.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으며 / 가볍게 가을을 나르고 있는 / 나뭇잎
그렇게 주고받는 /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 믿게 해 주십시오'
'이 커다란 세계'를 '떠받쳐' 나가는 것은 마땅히 무엇이어야 할까요?
시인님은 '가을을 나르고 있는 나뭇잎'이나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라고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나뭇잎'이나 '미소' 같은 순수한 것들은 외면당하거나 묵살당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나뭇잎'이나 '미소'와 반대되는 것들, 인간성을 상실케 하는 권력이나 자본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각박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가을에 시인님은 '가볍게 가을을 나르고 있는 나뭇잎'에 마음을 실어보고, '맑은 햇빛' 같은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 충만한 시간을 간구(懇求)하고 있네요.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쥔 아가의 / 작은 손아귀 안에 /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하나의 감각이 동시에 다른 영역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공감각적(共感覺的) 표현이 등장했네요.
종소리가 수많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세상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종소리에서 동그라미를 떠올린 시인님은 얼마나 섬세한지요?
그런 시인님의 따스한 눈길이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 모아쥔 아가의 / 작은 손아귀 안'까지 닿았습니다.
천진난만(天眞爛漫)한 아가가 하나님을 향해 모아쥔 기도의 간절한 손아귀라면 그 안에는 얼마나 순진무구(純眞無垢) 한 것이 들었겠는지요?
그 '작은 손아귀' 안에는 아가의 살냄새처럼 맑고 향기로운 삶의 질료 같은 보배가 있을 것만 같습니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고, 그 무엇으로도 파괴할 수 없는 삶의 순수한 가치 말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 우리의 어제오늘이 / 마침내 전설(傳說) 속에 묻혀버리는
해저(海底) 같은 그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순수하고 선량하게 살아온 우리네 삶이 헛되이 '전설(傳說)' 속에 묻혀버릴 것만 같은 현실입니다.
'해저(海底)'는 깊은 바다의 밑바닥입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입니다.
인간성이 억눌리고 훼손되는 현실, 그리하여 '해저(海底) 같은 그날'을 초래할 것만 같은 현실의 상황들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3. '무서운 진리'로부터 '아름다운 진리'를 지키게 해 주십시오
'달에는 / 은도끼로 찍어낼 /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眞理) 임을 /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그 꿈같은 '할머니의 말씀'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된 세상, 동심(童心)이 사라진 시대는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네요.
우리도 시인님의 소망처럼 현실의 각박함으로부터 벗어나 동심처럼 맑고 순수한 의식 속에서 아름다운 꿈을 지니고 살고 싶어 지네요.
시인님은 그것이야말로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眞理)'라고 합니다.
'어렸을 적에 /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 한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 그 속력(速力)으로 / 몇 번이고 까무러쳤던
그런 공포(恐怖)의 기억(記憶)이 진리(眞理)라는 / 이 무서운 진리(眞理)로부터
우리들의 이 소중한 꿈을 /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앞의 4연에서 우리 모두 소망하는 '아름다운 진리'와는 반대되는, '무서운 진리(眞理)'가 지금 우리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진리'는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겪었던 '아득하던 추락(墜落)'과 수없는 '까무러침'의 '공포(恐怖)의 기억'과 같은 것이라고 하네요.
그런 '추락'과 '까무러침'이 '어렸을 적' 기억만이 아니라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시가 나온 때는 1959년 즈음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전쟁, 그리고 빈곤과 기후변화, 만연하는 거짓과 독선의 정치, AI(인공지능) 같은 첨단과학 문명의 그늘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추락'과 '까무러침'을 거듭하고 있네요.
그래서 우리도 시인님의 간절한 시 구절을 읊조리며 저절로 기도하게 됩니다.
'이 무서운 진리(眞理)'로부터 우리들이 이 소중한 꿈을 꼭 안아 지키게 해 주십시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아름다운 가을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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