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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조지훈 시 봉황수

by 빗방울이네 2024.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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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훈 시인님의 시 '봉황수(鳳凰愁)'를 만납니다. 역사를 떠올리며 오늘을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조지훈 시 '봉황수(鳳凰愁)' 읽기

 
봉황수(鳳凰愁)
 
조지훈(1920~1968, 경북 영양)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들기도 둥주리를 마구 첬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조지훈 시선」(조지훈 지음, 오형엽 해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년) 중에서
 

2. 봉황이 시름에 잠긴 까닭은?

 
시 '봉황수(鳳凰愁)'는 조지훈 시인님 등단작입니다. 시인님은 1939년 「문장」에 시 '고풍의상'과 '승무', 이어 1940년에 '봉황수(鳳凰愁)'가 정지용 시인님의 추천으로 등단합니다.
 
그러니 시 '봉황수(鳳凰愁)'는 시인님 21세 즈음의 작품이네요.
 
시의 제목인 '봉황수(鳳凰愁)'의 '愁'는 '근심' '시름'을 말합니다. 그러니 제목을 '봉황의 근심' 정도로 새깁니다.
 
봉황은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상상 속의 새인데, 그 봉황이 왜 시름에 잠겼다고 할까요?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들기도 둥주리를 마구 첬다'
 
시인님은 지금 낡은 궁궐에 왔습니다. 궁궐의 기둥이며 지붕 추녀 등 궁궐의 외관을 훑어보고 있네요.
 
'두리기둥'은 둘레를 둥그렇게 깎아 만든 기둥을 말합니다. 그 기둥이 벌레 먹었다고 하네요. 벽이나 기둥 천장에 그려진 그림(단청)은 그 빛이 낡았다 하고요. 지붕 서까래(추녀) 끝에 달려있던 풍경소리도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그 자리에 산새와 비둘기들이 제멋대로 새집(둥주리→둥우리)를 쳐놓았다고 하네요.
 
예전에는 권세와 영화가 넘치던 공간이 주인을 잃고 이렇게 쇠락했네요. 시인님은 옛 궁궐을 찾아 무기력하게 몰락한 조선 왕조의 황량한 흔적과 마주쳤네요.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궁궐 외관을 둘러본 시인님의 시선은 궁궐 내부로 향합니다. 임금이 앉았던 '옥좌'가 보입니다.
 
'거미줄 친 옥좌'. '거미줄 친 옥좌'라는 구절이 가슴에 훅 들어옵니다. 멸망한 왕조를 이렇게 선명한 한 마디로 표현했네요. 
 
'큰 나라 섬기다'. 강대국(중국)에 대한 사대주의(事大主義)를 말하네요. 사대주의는 주체성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를 받들어 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사대주의의 표상으로 봉황이 등장했네요. 옥좌 위의 천정에 봉황이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중국 황제의 권위에 눌려 감히 쌍룡을 휘장으로 사용하지 못했네요. 쌍룡 대신 봉황이었을까요. '큰 나라'에 스스로 신하를 자처하다 망국에 이른 왕조의 비애가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 그래서 이 구절은 시인님의 슬픈 탄식처럼 들립니다.
 
- 큰 나라 섬기기에 그리 급급하더니 이렇게 거미줄을 치고 말았구나!
 

"큰 나라 섬기다가" - 조지훈 시 '봉황수' 중에서.

 

 

3. 봉황의 근심은 약소국의 근심이자 그 백성의 근심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늘 쌍룡(큰 나라)의 권위에 눌렸던 봉황(조선)입니다. 쌍룡을 의식하여 스스로 봉황을 자처하고, 종속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하의 나라였습니다. 그렇게 기백도 웅지도 없는 봉황이어서 힘껏 소리 내어 울어본 적도 없었을 거라고 시인님은 한탄하는 것만 같네요. 
 
궁궐 안을 들여다보다 비탄에 젖은 시인님은 이제 궁궐 마당을 거닐고 있습니다.
 
'추석(甃石)'은 벽돌(甃)처럼 다듬어진 돌인데, 여기서는 궁궐 마당에 깔려있는 납작한 돌들을 말하겠네요.
 
그 추석들이 널린 궁궐 마당에는 정일품, 종구품 같은 벼슬을 새긴 '품석(品石)'들이 두 줄로 세워져 있습니다. 동쪽에는 문관인 동반(東班), 서쪽에는 무관인 서반(東班)이 자리하고 있었겠지요. 
 
'패옥(佩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법복이나 문무백관의 조복과 제복의 좌우에 늘여 차던 옥줄을 말합니다. 흰 옥을 이어서 무릎 밑까지 내려가도록 만든 장식품이네요. 문무백관들이 궁궐 마당에서 회의를 하려고 저마다의 품석으로 움직일 때마다 마당 가득 패옥 소리가 요란했을 것 같네요. 
 
그 '패옥 소리도 없었다'라고 합니다. 그 궁궐의 뜰에서 패옥 소리를 울리던 주인공들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나의 몸 둘 곳은 바이없었다'. '바이'는 '아주 전혀'라는 뜻의 부사입니다. '바이없다'는 '어찌할 도리나 방법이 전혀 없다'의 뜻입니다.
 
주권을 잃어버린 망국민, 자신이 자리할 곳이 어디에도 없음을 절감한 시인님은 쓸쓸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황폐한 궁궐 마당을 거닐고 있네요.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구천(九天)'은 '가장 높은 하늘' 또는 '대궐 안'을 뜻하기도 합니다. 
 
'호곡(呼哭)'의 '호(呼)'는 '부르다'의 뜻도 있고, '부르짖다, 슬프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곡(哭)'은 '울다'의 뜻. 그래서 '호곡(呼哭)'은 '부르짖으며 슬프게 운다'라는 의미로 새깁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르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시인님은 봉황새가 되었네요. 봉황새에 자신의 감정이 이입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가장 높은 하늘(구천)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슬프게 울겠다고 합니다. 쌍룡에 눌리는 봉황의 신세가 되어 국가의 기상을 힘껏 떨치지도 못하고 망해버린 설움을 한껏 터뜨리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인님은 울지 않네요. 눈물이 속된 줄 알기 때문에, 눈물이 부질없는 것인 줄 알기 때문에 울지 않는다고 합니다. 
 
울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인님은 속으로 슬피 울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일제 말기 몰락한 고궁에 가서 왕조를 잃고 나라를 잃은 큰 슬픔을 내면으로 삭이고 있네요.
 
제목 '봉황수(鳳凰愁)'를 다시 생각합니다. 여기서 '봉황의 근심'은 바로 약소국 수심(愁心), 그 백성의 시름이었네요.
 
시를 다 읽고 나니 이 구절이 가슴에 남습니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지금은 어떠냐고, 잘 대처하며 살고 있는지 시인님이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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