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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윤동주 시 바람이 불어

by 빗방울이네 2024. 6.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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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님의 시 '바람이 불어'를 만납니다. 암울한 시간에도 단단한 자아를 지키며 사랑하며 아파하며 살아가겠다는 윤동주 시인님의 각오가 담긴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바람이 불어' 읽기

 
바람이 불어
 
윤동주(1917~1945,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을까,
 
단 한 여자(女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발이 반석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발이 언덕우에 섰다.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10주기 증보판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2002년) 중에서
 

2.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라고 한 까닭

 
윤동주 시인님의 시 '바람이 불어'가 쓰인 날은 1941년 6월 2일입니다.
 
일제 식민통치의 살벌한 폭압이 극에 달하던 시기, 연희전문 졸업반 때 쓰인 시네요.
 
시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일 것입니다. 오늘은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을 따라 '바람이 불어'를 만나러 갑니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까'
 
삶에서 고민이 깊어지고 생각이 많아지면 누구라도 강가나 언덕 같은 높은 곳으로 가곤 합니다.
 
거기서 평소에는 잘 하지 않았던 생각에 잠깁니다. 저 강물은, 저 바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그러면 아무 규칙없이 흘러가고 불어 가는 것처럼 보이던 강물이나 바람이 어떤 보편적이고 영원한 인과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강물이나 바람처럼 그렇게 보편적이고 영원한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존재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현실을 살았던 윤동주 시인님의 대학 4학년 때,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뇌를 많이 했던 시기입니다.
 
시인님도 광대무변의 바람을 보면서 그 대자연 속에서 바람처럼 시간을 타고 있는 자신을 보았겠지요?
 
'바람이 부는데 /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다'
 
이 연에는 두 가지 진술이 있네요. 먼저 바람이 불어 괴롭다는 점, 그리고 그 괴로움의 이유가 없다는 점입니다.
 
시인님은 '서시'에서도 그랬습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시 '서시' 중에서
 
아주 작은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가 얼마나 힘들까, 그런 잎새가 가여워서 '나'는 괴롭다는 말입니다. 
 
이 '서시'의 한 구절을 읽으니 백석 시인님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시름차지 아니하겠습니까?
시인은 슬픈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입니다.
▷「여수시초」(박팔양 시인 시집)'에 대한 백석 시인의 독후감 중에서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슬프고 시름에 찰 수밖에 없다고 하네요.
 
이 문장을 깊이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바람이 불어 이유없이 괴롭다는 윤동주 시인님의 마음을 생각해 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얼마나 여리고 순결한 영혼이겠는지요?
 

"시대를 슬퍼한 일" - 윤동주 시 '바람이 불어' 중에서.

 

 

3.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의 뜻은?

 
'바람이 부는데 /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다'
 
그런 여리고 순결한 마음의 시인님이 느끼는 괴로움이라는 것은 삶이 잉태하고 있는 원천적인 괴로움이자 슬픔일 것입니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理由)가 없을까'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나의 괴로움에는 바람이 불어서 괴로운 일 말고 과연 이유가 없을까 하는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단 한 여자(女子)를 사랑한 일도 없다 / 시대(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이 구절은 의미가 여러 겹 쌓여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은 시인님의 처절한 고백으로 다가옵니다.
 
이는 또한 사랑하고 슬퍼하기는 했지만 더 치열하게 사랑하고 슬퍼한 일이 없다는 말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시인님은 이 즈음의 시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시대를 아파하며 자신의 나아갈 길을 모색합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는 시인님의 뜨거운 다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지금까지의 시간을 지우겠다는 마음, 그래서 앞으로 사랑하며 슬퍼하는 일을 철저한 실천으로 옮기겠다는 뉘앙스 말입니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 내발이 반석우에 섰다 //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 내발이 언덕우에 섰다'
 
이 구절의 '~부는데'와 '~흐르는데'의 '~ㄴ데'에서 행여나 '그런데'의 의미에 휘둘리면 우리는 이 시에서 길을 잃고 맙니다.
 
'그런데'는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 때 쓰는 접속부사입니다. 'but'에 가깝습니다.
 
여기서의 '~ㄴ데'는 '~하는 동안'의 의미로 새깁니다. 'while'입니다.
 
2023년 11월 영국 국왕 찰스 3세가 버킹엄궁에서 열린 우리나라 대통령과의 만찬 중에 이 구절을 영어로 낭송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While'로 번역했네요.
 
While the wind keeps blowing, My feet stand upon a rock.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While the river keeps flowing, My feet stand upon a hill.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바람'과 '강물'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불고 흘러갑니다. 
 
그렇게 바람이 부는 동안, 강물이 흐르는 동안  내 발은 반석 위에, 언덕 위에 섰다고 합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일까요?
 
'반석(盤石)'의 의미는 '넓고 평평한 큰 돌' 또는 '사물 사상 기틀 따위가 아주 견고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누구도 쉽게 허물 수 없는 단단한 자리입니다.
 
'언덕'은 높은 곳, 이 역시 누가 쉽사리 침범하거나 허물 수 없는 곳입니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 내발이 반석우에 섰다 //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 내발이 언덕우에 섰다'
 
그러므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세월이 흘러가는 사이 내 발은 그렇게 누구도 쉽사리 허물 수 없는 자리에 섰다는 의미겠습니다.
 
'내 발'이 확고한 바탕 위에 섰다는 말은 시인님의 자아가 확고하게 섰다는 의미로 다가오네요. 누구도 쉽사리 자신을 흔들 수 없다는 말이겠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혼란과 억압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하게 지켜가겠다는 시인님의 비장한 각오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내가 반석 위에 섰다'가 아니라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의지로 된 일이 아니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암울한 현실 속에서 순결한 영혼으로 타자를 연민하며 세상 온갖 것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시인님이 그런 '반석'과 '언덕'에 도달하게 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겠지요?
 
시인님이 그 당시 그렇게 단단하게 자아를 지켜며 결행하려고 했던 일은 그 후의 현실 속에서 펼쳐졌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시를 다 읽고 나니 이 구절이 가슴에 남습니다. 
 
'시대(時代)를 슬퍼한 일도 없다'
 
'그대는 어떤가?' 하고 시인님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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