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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윤동주 시 병원

by 빗방울이네 202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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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님의 시 '병원'을 만납니다. 시인님은 많이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시인님에게 병이 없다고 하네요.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병원' 읽기

 
병원(病院)
 
- 윤동주(1917.12.30 ~1945.2.16)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병원(病院)뒤뜰에 누어, 젊은 여자(女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日光浴)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女子)를 찾어 오는 이, 나비 한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試鍊), 이 지나친 피로(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여자(女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花壇)에서 금잔화(金盞花) 한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病室)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여자(女子)의 건강(健康)이- 아니 내 건강(健康)도 속(速)히 회복(回復)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었든 자리에 누어본다.
 

-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1955년 증보판 오리지널 디자인(윤동주 지음, 소와다리 발행, 2022년) 중에서 

 

2. 시 '병원'을 만나기 전에 알아보는 이야기들


윤동주 시인님은 생전에 시집을 내지 못했습니다. 시인님은 1941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 졸업 기념으로 자신의 시 중에서 19편을 뽑아 시집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검열에 따른 신변 위협 우려,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시집 출간에 실패합니다.
 
시인님은 대신 손으로 19편의 시를 직접 원고지에 써서 필사본 시집 3부를 만들었습니다. 그중 한 부는 자신이, 나머지는 이양하 교수님과 정병욱 후배님에게 각 1부씩 증정됐습니다.
 
정병욱 님이 받은 필사본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의 윤동주 시인님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정병욱 님은 윤동주 시인님의 연희전문학교 기숙사 룸메이트였습니다. 시인님 3학년 때 입학 한 정병욱 님은 시인님보다 다섯 살 아래였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서로 흉금을 터놓고 지낸 사이였다고 합니다.
 
전남 광양 출신인 정병욱 님은 윤동주 시인님의 필사본 시집을 고향집 장독대에 꽁꽁 숨겨두었습니다. 그 필사본을 해방 후 월남한 유족에게 전했습니다. 그는 윤동주라는 시인을 세상에 알린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이처럼 시집을 꽁꽁 숨겨야만 했던 시절이라니요!
 
윤동주 시인님이 필사본을 정병욱 님에게 증정했을 때 시집 이름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이 시집의 제목이 「병원(病院)」이 될 뻔한 사연이 있습니다.
 
1941년 당시 시인님이 필사본 시집을 정병욱 님에게 건네주던 상황이 담긴 문장을 만나봅니다. 아래는 정병욱 님의 회고입니다.
 
(윤동주 시인님은) 처음에는 시집 이름을 「병원」으로 붙일까 했다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病院)」이라고 써넣어주었다.
그 이유는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병원이란 앓는 사람을 고치는 곳이기 때문에
혹시 앓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느냐고
겸손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 「윤동주평전」(송우혜 지음, 서정시학, 2018년) 중에서. 정병욱 님이 「나라사랑」 23집(외솔회)에 실은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의 일부

 
그래서 시 '병원'의 제목을 따 시집 제목이 「병원」이 될 뻔했던 겁니다. 「병원」이라고 하려 했던 때는 시인님이 '서시'를 쓰기 전이었습니다. '서시'를 쓰고 난 뒤 시인님은 시집 제목을 「병원」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바꾸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윤동주 시인님의 시 '병원'의 품으로 가는 확실한 지름길로 접어들게 되었네요.

 

윤동주시병원중에서
'나한테는 病이 없다고 한다' - 윤동주 시 '병원' 중에서


 

 

3.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시 '병원'은 1940년 12월에 쓰인 것입니다. 그즈음은 일제 강점기의 폭압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말과 글을 빼앗기고, 이름마저 빼앗기고 일제에 주권을 빼앗긴 채 그들의 잔인한 폭력에 무력하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암울한 절망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절망의 시대, 시인님이 1939년 9월 이후로 절필했다가 처음 쓴 시가 바로 이 '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의 제목을 따 시집 제목을 「병원」이라고 하려 했던 것입니다. 세상이 이처럼 암울한 절망이라는 병을 앓는 이들로 가득하니 시인님 자신의 시들이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서요.

 
자신의 시집이 아픈 사람을 치유하는 병원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시인님의 말, 참 다정하게 다가오네요.

살구나무 그늘로 얼골을 가리고, 병원(病院)뒤뜰에 누어, 젊은 여자(女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 놓고 일광욕(日光浴)을 한다.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女子)를 찾어 오는 이, 나비 한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 윤동주 시 '병원' 중에서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 '이 여자'의 병은 정신적인 질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새깁니다. '이 여자'의 행위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네요. 시인님은 한나절이 기울도록 이 여자를 지켜보고 있었나 봅니다. 그 사이 아무도 이렇게 아픈 여자를 찾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병원 특유의 무기력하고 암담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병원/세상은 지금 의식의 흐름이 멈춘 상태, 정상적인 사고나 행동을 할 수 없는 검은 시간의 세상입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어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病)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病)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試鍊), 이 지나친 피로(疲勞),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 윤동주 시 '병원' 중에서

 
시인님도 아파서 병원에 왔지만 의사는 시인님에게 병이 없다고 합니다. 처참하고 치욕적인 시대에 절망하여 병든 의식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병입니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된다'. 이때 시인님은 겨우 24세 청춘이었습니다. 시인님의 깊은 좌절과 고뇌가 느껴집니다.
 
여자(女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花壇)에서 금잔화(金盞花) 한포기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病室)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女子)의 건강(健康) - 아니 내 건강(健康)도 속(速)히 회복(回復)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었든 자리에 누어본다.

- 윤동주 시 '병원' 중에서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로 가득한 사회였습니다.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처럼, 시인님처럼 속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진 환자들이 가득한 시간이었습니다. '그가 누었든 자리에 누어본다'. 이 구절에서 타자에 대한 시인님의 따뜻한 연민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가 누었든 자리에' 누워보는 것 외에, 그 병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 무엇이라도 할 수 없었던 시인님의 안타까움도 진하게 느껴지네요.
 
이렇게 시인님은 차가운 절망의 우물에 우리를 풍덩 빠뜨렸다가 다시 꺼내주시네요. 이런 고통의 시간이 있었음을 직시하며 살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윤동주 시인님의 시 '코스모스'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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