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월림장'을 만납니다. 이 시를 읽으니 햇기장쌀로 빚은 호박죽도 찰밥도 먹고 싶네요. 함께 샛노랗디 샛노란 햇기장쌀을 주무르며 저마다의 마음을 주무르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월림장' 읽기
月林장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自是東北八0粁熙川」의 標말이 선곳
돌능와집에 소달구지에 싸리신에 옛날이 사는 장거리에
어니 근방山川에서 덜걱이 껙껙 검방지게 운다
초아흐레 장판에
산 멧도야지 너구리가죽 튀튀새 낫다
또 가얌에 귀이리에 도토리묵 도토리범벅도낫다
나는 주먹다시 가튼 띨당이에 꿀보다도 달다는 강낭엿을 산다
그리고 물이라도 들듯이 샛노라티 샛노란 山골 마가을 벼테 눈이 시울도록 샛노라티 샛노란 햇기장 쌀을 주물으며
기장쌀은 기장찻떡이 조코 기장차랍이 조코 기장감주가 조코 그리고 기장쌀로 쑨 호박죽은 맛도 잇는것을 생각하며 나는 기뿌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년 1쇄, 2019년 32쇄) 중에서
2. '덜걱이 껙껙 검방지게 운다'
백석 시인님의 시 '月林장'은 1939년 11월 11일 조선일보에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28세 때네요.
시가 발표됐을 당시의 원문 그대로 감상합니다. 한자도 표기됐던 그대입니다.
백석 시인님은 시에서 방언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시가 매우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딱딱하고 거친 굴껍데기를 까면 향기로운 속살이 나오지 않습디까? 우리 바위에 들러붙은 굴을 따서 껍질을 까봅시다.
제목 '월림장'은 월림이라는 지역에 서는 시장이라는 뜻이네요. 평안북도 북신현면에 있는 산골마을입니다. 시인님은 여행 중에 거기에 서는 장에 갔습니다.
「自是東北八0粁熙川」의 標말이 선곳
- 백석 시 '월림장' 중에서
시의 첫 행에서 아주 독특한 문장을 만납니다. 시인님은 푯말에 있는 이 문장이 얼마나 특별하게 다가왔기에 시에서 매우 중요한 '시의 첫 행'으로 이 문장을 가져왔을까요? 한 자씩 뜯어보십시다.
'自是'. '자(自)'는 '스스로', '저절로'의 뜻도 있지만 '~서부터'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시(是)'는 '옳다'는 뜻과 함께 '여기'라는 의미도 있네요. 그러니 '自是'는 '여기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도로표지판 문장의 전체 뜻은 '여기부터 동북(東北)으로 80 킬러미터를 가면 희천(熙川)이다'는 말입니다. '천(粁)'은 킬로미터를 나타냅니다. '희천'은 평안북도 희천군. 그러니까 희천은 큰 도시겠네요. 월림에서 희천까지 80킬로미터, 200리 길이네요. 그만큼 월림은 산골짜기 마을입니다.
돌능와집에 소달구지에 싸리신에 옛날이 사는 장거리에
- 백석 시 '월림장' 중에서
시인님이 마주친 월림장의 첫인상입니다. 기와가 아닌 납작한 돌로 지붕을 덮은 돌너와집이 있고요, 소가 끄는 달구지도 있고요, 싸리 껍질을 벗겨 짚신처럼 삼은 싸리신을 신은 사람도 보이네요. 옛날에 흔하던 것이 지금 있다고 합니다.
넷말이 사는 컴컴한 고방의 쌀독 뒤에서 나는 저녁 끼때에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하였다
- 백석 시 '고방' 중에서
이 시에도 '옛날이 사는'과 비슷한 느낌으로 '넷말이 사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인님은 이렇게 '옛날이 사는' 또는 '넷말이 사는' 같은 특별한 시어로 우리를 옛날로 슬쩍 데려가곤 하네요.
어니 근방山川에서 덜걱이 껙껙 검방지게 운다
- 백석 시 '월림장' 중에서
이 행의 꿩소리는 멋진 팡파르입니다. 시의 커튼을 호기롭게 열어젖히는 극적인 효과를 내고 있습니다. 어느 근방 산천에서 수꿩(덜거기)이 껙껙 건방지게 운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인님은 그 수꿩이 '건방지게' 운다고 합니다. 수꿩의 울음소리는 까투리(암꿩)를 부르는 소리일 텐데요, '어디서 대놓고 애정 행각인고!' 하는, 장난기 가득한 시인님의 눈총이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초아흐레 장판에 / 산 멧도야지 너구리가죽 튀튀새 낫다 / 또 가얌에 귀이리에 도토리묵 도토리범벅도낫다
- 백석 시 '월림장' 중에서
그달 9일에 열린 장날이네요. 개똥지빠귀(튀튀새)도 있고요, 밤처럼 고소한 맛의 개암나무 열매(가얌), 곡식인 귀리, 도토리묵도 있고요, 도토리범벅도 있다고 합니다.
'범벅'이라는 음식은 호박이나 콩을 푹 삶아서 곡식의 가루를 넣어 만든 죽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도토리범벅은 도토리가루로 쑨 죽이네요. 도토리묵과는 어떻게 다른 맛일까요? 먹고 싶어 지네요. 빗방울이네는 호박범벅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늙은 호박으로 만든 호박범벅이 겨울날의 고방에 있었는데 며칠 내내 오며 가며 그 차갑고 단 범벅을 몇 숟가락씩 맛있게 퍼먹던 기억이 나네요.
이 연에서 주목할 점은 '낫다'는 표현이 2번 등장하면서 시에 신선한 산소를 뿜뿜 불어넣고 있다는 점입니다.
'낫다'는 '났다'는 말이네요, '나다'의 용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시장에 팔려는 어떤 물건이 나왔다는 말이겠죠. 월림장에는 참으로 신기한 것이 많이 나네요. 호기심 가득한 시인님이 눈빛 줄기를 좌판 여기저기 바쁘게 투시하고 있는 중입니다. 정말 신나겠네요. '이것도 낫다, 저것도 낫다, 아이고 좋구나! 이런 느낌이 들고요.
3. '눈이 시울도록 샛노라티 샛노란 햇기장 쌀을 주물으며'
나는 주먹다시 가튼 띨당이에 꿀보다도 달다는 강낭엿을 산다
- 백석 시 '월림장' 중에서
이것저것 구경하던 시인님은 주먹만한 떡(띨당이)과 강낭엿을 샀다고 하네요. 강낭엿은 옥수수(강냉이)를 고아서 만든 엿이겠네요. '샀다'가 아니라 '산다'라고 했네요. 그래서 시인님이 지금 막 떡과 엿을 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네요. 침을 꿀꺽 삼키며 떡을 건네받고 있는 시인님의 울렁거리는 목젖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물이라도 들듯이 샛노라티 샛노란 山골 마가을 벼테 눈이 시울도록 샛노라티 샛노란 햇기장 쌀을 주물으며
- 백석 시 '월림장' 중에서
시의 도입부가 소리(꿩 울음)였다면 이곳 대단원은 조명이네요. '샛노라티 샛노란' 조명요. 얼마나 샛노랬으면 '샛노라티 샛노란'이 두 번이나 반복되네요. 이 강렬한 황금빛에 우리도 시인님처럼 눈이 시릴 지경이네요.
'마가을'은 막 가을, 늦가을입니다. '기장'은 볏과의 곡식으로 떡이나 술, 엿, 빵을 만듭니다.
늦가을의 오후였을까요? 산골마을이니 주위 산은 온통 단풍이겠네요. 그 단풍빛에 반사되어 그렇잖아도 환한 가을햇살은 더욱 노랬겠네요. 그 황금 햇살이 샛노란 햇기장 쌀에 스미고 있으니 얼마나 눈부시겠는지요? 그 기장쌀 한번 만져보고 싶네요.
눈이 부셔 미간을 좁힌 시인님이 참지 못하고 햇기장 쌀을 주무르고 있네요. 한 손으로 기장쌀을 조금 퍼서 손을 오므렸다 폈다 하면서 느끼고 있는, 기장쌀의 부드럽고 따뜻하고, 손가락 사이로 스스르 빠져나가는 간지러운 촉감이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기장쌀은 기장찻떡이 조코 기장차랍이 조코 기장감주가 조코 그리고 기장쌀로 쑨 호박죽은 맛도 잇는것을 생각하며 나는 기뿌다
- 백석 시 '월림장' 중에서
기장찰떡(찻떡), 기장찰밥(차랍), 기장감주(식혜, 단술), 기장호박죽! 아, 정말 맛있는 거 다 등장하네요. 그 흔했을 음식이 지금은 찾아보기도 어려운 음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중에서도 기장호박죽이 먹고 싶네요, 아니 기장찰밥도요, 아니 전부 다요. 노란 색감, 얼마나 노랗게 맛있겠는지요?
마지막 2개의 행은 행의 길이가 다른 행의 2배가량 깁니다. 그만큼 눈을 뗄 수 없고, 멈출 수 없을 만큼 신이 나서 상황에 몰입하고 있는 시인님의 심리상태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네요.
그렇게 맛있는 것을 열거해 놓고 시인님은 '나는 기뿌다'라고 마무리하네요. 그것을 '생각'만 해도 '기뿌다'고 하네요. 이처럼 소박한 음식들을 떠올려놓고 마냥 흐뭇해하는, 참으로 소박하고 욕심 없는 시인님! 시인님이 그렇게 기쁘다 하시니 우리도 기쁩니다!
아, 어서 시골장에 놀러 가고 싶어 지네요. 기장쌀도 주무르고 싶고요, 기장호박죽도 먹고 싶고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추일산조'를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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