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님의 시 '들국화' 2편을 만납니다. 제목은 같은데 분위기는 매우 다른 시입니다. 시인님이 건네주신 '들국화' 향기를 함께 맡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천상병 시 '들국화' 읽기
들국화
- 천상병(1930~1993, 일본 출생, 창원 성장)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
- 「천상병 전집·시」(천상병 지음, 평민사, 1996년 1쇄, 2007년 12쇄) 중에서
2.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
위의 시 '들국화'는 1970년 6월 「창작과 비평」에 발표됐습니다. 천상병 시인님 41세 때네요.
산등성이 외따른 데 / 애기 들국화
- 천상병 시 '들국화' 중에서
시인님은 이 가을에 들국화를 만났습니다. 그것도 산등성이에서요. 산등성이 중에서도 외진 곳에서요. 들국화 중에서도 애기 들국화를요. 들국화 중에서도 아주 작은 꽃을 피운 들국화였나 봅니다. 그것도 한송이였나 봅니다.
이 시기 시인님은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때입니다.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고, 그 고문 후유증과 심한 음주로 인한 영양실조로 1971년에는 거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시 '들국화'는 시인님이 거리에서 쓰러지기 1년여 전에 쓰였네요.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시인님의 삶, 혼자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요?
이렇게 '산등성이 외따른 데' 사는 '애기 들국화'는 시인님의 처지 같습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고요, 또 혼자라서 춥고 무섭고 외롭네요. 철저히 소외된 공간에 있는 그 불쌍한 애기 들국화가 자신이라고 합니다. 시인님은 아마도 울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바람도 없는데 / 괜히 몸을 뒤뉘인다
- 천상병 시 '들국화' 중에서
들국화가 몸을 뒤로 누인다고 합니다. 바람이 없었을리가요. 약한 바람에 흔들리는 적막한 공간의 연약한 애기 들국화네요. 시인님의 고독은 또 얼마나 고요한 고독인지요. 없는 것만 같은 미풍에도 시인님은 흔들리고 있네요.
가을은 다시 올 테지
- 천상병 시 '들국화' 중에서
자연은 어김없이 순환합니다. 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이어서 봄 여름이 오고 가면 가을이 옵니다. 그렇게 가을은 다시 올 테지만 무언가는 다시 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고통의 나날을 겪고 있는 시인님의 미래는 불투명하기만 합니다.
다시 올까? /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 지금처럼 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
- 천상병 시 '들국화' 중에서
시인님은 한 떨기 들국화에서 자신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적막한 공간에 혼자 피어있었구나. 얼마나 힘들었니? 자신에게 말하듯 들국화에게 말했을 것만 같네요. 위로하듯이요.
들국화 앞에 무릎을 꿇고 들국화와 대화하고 있는 시인님이 보입니다. 들국화에 점점 몰입되어 들국화의 외로움과 시인님의 외로움이 서로 순하게 겹쳐졌다고 합니다. 서로를 안아주었다고 합니다.
시인님은 이런 순간이 '다시 올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귀한 순간이 다시 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네요. 이 들국화 앞에 내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삶은 위태롭고 무상하다는 말이네요.
그런데요, 이 마지막 연을 자꾸 반복해 읽다 보면, 들국화와 하나가 되는 시인님의 따스한 마음이 되어 보면, 우리는 시인님의 외로움이 들국화의 외로움과 접속하여 우주 무한공간으로 스며 소멸되는, 신비로운 해방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 점이 이 시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3. '나는 일심(一心)으로 시 공부를 해야겠다'
시인님은 '들국화'를 제목으로 두 편의 시를 썼습니다. 앞의 '들국화'는 1970년 41세 총각 때 쓰인 것이고, 아래의 '들국화'는 결혼 후 쓰인 것입니다. 1984년 12월 「월간문학」에 발표된 시 '들국화', 함께 보시지요.
들국화
- 천상병
84년 10월에 들어서
아내가 들국화를 꽃꽂이했다.
참으로 방이 환해졌다
하얀 들국화도 있고
보라색 들국화도 있고
분홍색 들국화도 있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는데
우리 방은 향기도 은은하고
화려한 기색이 돈다
왜 이렇게도 좋은가
자연의 오묘함이 찾아들었으니
나는 일심(一心)으로 시 공부를 해야겠다.
- 위 같은 책 중에서
앞의 시 '들국화'와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시인님은 1972년 친구의 동생인 목순옥 님과 결혼을 합니다. 이렇게 외롭고 아프고 경제력 없는 43세의 노총각 시인님과 결혼하고, 평생 시인님의 삶을 알뜰히 챙겨준 목순옥 님은 천사인 것만 같습니다. 자진해서 천사옷을 숨겨두고 하늘로 가지 않고 있던 천사 말입니다.
앞의 시 '들국화'에서 느껴진 외로움을 뒤의 '들국화' 시에서는 느낄 수 없습니다. 아내 덕분이겠지요? 그 사랑스럽고 고마운 아내가 들국화 꽃꽂이를 해서 방에 꽂았네요. 그래서 방에 '향기도 은은하고 화려한 기색이 돈다'라고 합니다. 얼마나 좋았겠는지요?
그런데 시의 마지막 구절 좀 보셔요.
나는 일심(一心)으로 시 공부를 해야겠다
- 천상병 시 '들국화' 중에서
우리의 의표를 찌른, 이 예상치 못한 진실되고 천진난만한 마지막 행에서 무릎에 힘이 다 빠지는 것만 같습니다. 들국화가 방으로 와 '자연의 오묘함이 찾아들었으니' 오로지 한 곳에 마음을 집중해 '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하네요. 자연의 오묘한 힘을 빌려서 할 일은 '시 공부'였네요.
무욕의 삶 속에서 오로지 어린아이 같은 천사성으로 바르고 밝고 맑게 살다 보면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인님은 선생님(아내/자연) 말씀 잘 듣는 착한 초등학생 같습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싶은 시인님인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천상병 시인님의 '나의 가난은'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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