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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유치환 시 그리움

by 빗방울이네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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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인님의 시 '그리움'을 만납니다. 애타는 그리움을 이처럼 절절하게 표현한 시도 드물 것입니다. 이 시에는 어떤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유치환 시 '그리움' 읽기


그리움
 
- 유치환(1908~1967, 경남 통영)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시집 「생명의 서」(미래사, 1991년 1쇄, 1996년 10쇄) 중에서


2. 세기의 로맨스,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 시인의 사랑 

 
청마 유치환 시인님의 시 '그리움'은 1965년 발간된 시인님의 13번째 시집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에 실렸습니다. 시집의 제목도 시 '그리움'의 한 구절을 따서 지었네요. 그만큼 시 '그리움'은 시인님에게도 중요한 시라는 뜻이겠네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시 '그리움' 중에서

 
시 '그리움'은 아주 절절한 사랑시입니다. 시에서 시인님의 가쁜 숨결이 느껴집니다. 파도는 잠시도 쉬지 않지요. 시인님의 그리움도 끊임없이 밀려오네요.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이 구절은 사랑을 향한 그리움도, 그 그리움을 어쩌지 못하는 괴로움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시인님의 절규로 들리네요. 파도처럼 잠시도 멈추지 않고 일어나는 그리움과 괴로움, 희망과 절망으로 시인님 마음은 온통 폐허가 된 것만 같습니다. 

이 시에 대해 시인님은 '40대의 그리움'이라고 말한 일이 있습니다.(「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 : 김광회 엮음, 지문사, 1984년) 
 
과연 시인님은 누구를 이토록 연모하고 있을까요?
 
님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 유치환 시 '그리움' 중에서

 
그즈음 청마(靑馬) 유치환 시인님의 삶에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바로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 님(1916~1976, 경북 청도)입니다. 당시 두 사람의 공공연한 로맨스는 세간의 큰 화제였습니다. 과연 어떤 사랑이었을까요?
 
1945년 해방 후 청마는 통영여자중학교 국어교사로 근무하게 됩니다. 거기에 정운은 가사교사였고요. 청마 38세, 정운은 30세였네요.
 
청마는 처음 3년 동안 정운에게 매일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뭍같이 까딱' 않던 정운의 마음이 열렸다고 하네요. 그리고 두 사람은 20년의 사랑을 이어갔습니다.

20년 동안 문학의 동지로 편지로만 사랑을 나누었던 관계입니다. 청마는 매일 정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가 무려 5,000여 통에 달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희대미문(稀代未聞)의 로맨스가 아닐 수 없네요.
 
이영도 시인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영도 시인님의 시비(詩碑)가 부산 동래구 온천동의 금강공원에 세워져 있습니다. 그 시비에 3편의 시조가 새겨져 있네요. 이 시조 속의 정(情)이 청마를 향한 것이었을까, 짐작해 봅니다.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 심지 돋으고 이마 맞대이면 / 어둠도 도운 애정에 삼가한 듯 둘렸다

- 이영도 시조 '단란' 전문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 알알 익은 고독 기어히 터지는 추정(秋情) /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 이영도 시조 '석류' 전문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흩는다

- 이영도 시조 '모란' 전문

 
이영도 시인님은 이호우 시인님(1912~1970)의 여동생입니다.  이호우 시인님은 우리 모두 사랑하는 '개화' '살구꽃 핀 마을'을 쓴 시인님입니다. 
 

유치환시그리움중에서
유치환 시 '그리움' 중에서.

 


3. 청마의 명편은 사랑의 힘이 탄생시킨 것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날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시 '그리움' 중에서

 
그 당시 청마는 기혼자였고, 정운은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청마의 '행복'이라는 시도 정운에게 보낸 시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뜨거운 연정이네요.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오늘도 나는 /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중략)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했네라

-  유치환 시 '행복' 중에서 

 
우리는 이즈음에서 청마의 부인(권재순 여사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편과 다른 여인과의 로맨스, 부인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위 책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에 따르면, 부인에게 정운은 고향 친구의 동생이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청마와 정운)의 교제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퍼졌을 때 부인은 두 사람의 신상에 해가 되지 않도록 정운을 타이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운은 '청마와는 단지 같은 교직자이며 문인 사이의 교우관계이니 너무 심려 말라'며 부인을 위로했다고 하네요.
 
이 사태를 부인은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남편 청마의 창작의욕이 위축되거나 상처를 입을까 봐 두 사람의 관계를 막지 않고 스스로 극기하며 청마를 포용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큰 사랑이 아닐 수 없네요. 
 
정운에게 보낸 청마의 편지는 한결같이 애틋한 정을 호소하는 내용이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의 사랑은 순수한 영혼 간의 교류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청마가 이런 관계를 이어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가 이렇듯 당신을 애모함은 무슨 연유이라?
당신의 용모? 당신의 자질?
- 아니거니!
당신을 통하여 저 영원에의 목마름을 달래려는 한 가상(假像)으로 -
그러기에 아득한 별빛을 우러르면 더욱 애닮게도 그리운 당신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김광회 편저, 지문사, 1984년)에 실린 유치환 산문 단장(斷章) '목마름' 전문


그래도 이 시절의 자로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사랑이네요. 그러나 우리는 이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청마와 정운의 사랑이 어떤 차원 높은 형태의 사랑이라는 것, 세상에는 참으로 소중한 여러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 말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어떤 절대가치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하려는 멀고 험한 도정(道程)에서,
어떤 형태로든 사랑의 힘을 벗 삼을 수 있다는 일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 위 같은 책 중에서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청마 유치환 시인님의 시 '생명의 서'를 만나 보세요.

 

유치환 시 생명의 서 읽기

유치환 시인님의 시 '생명의 서 일장'을 만납니다. 참다운 '나'를 찾아 나선 시인님의 결연한 의지, 그 뜨거운 기운으로 저마다 마음을 씻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유치환 시 '생명의 서 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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