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지성교정론」에 나오는 '지각 방식'에 대한 문장을 만납니다. 우리는 사물을 어떻게 인식할까요? 우리가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으로 사물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스피노자 「지성교정론」의 '지각 방식'에 대한 문장 읽기
면밀히 살펴보면, 모든 지각 방식은 가장 주요하게 네 가지로 간추릴 수 있다.
1. 소문으로부터, 또는 이른바 규약적인 어떤 기호로부터 갖는 지각이 있다.
2. 무작위적 경험에 의해, 즉 지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은 경험에 의해 갖는 지각이 있다 ···
3. 한 사물의 본질이 다른 것으로부터 도출되되, 적합하지 않게 도출될 때의 지각이 있다 ···
4. 마지막으로 사물이 오직 그것의 본질만으로 지각되거나 아니면 그것이 가까운 원인에 대한 인식을 통해 지각될 때의 지각이 있다.
- 「지성교정론」(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 지음, 김은주 옮김, 도서출판 길, 2020년) 중에서
2. 사물에 대한 4가지 지각 방식에 대하여
위 책 「지성교정론」의 부제목은 '지성을 교정하고 지성이 사물을 참되게 인식하도록 이끄는 최적의 길에 대한 논고'입니다. 참 길지요?
「지성교정론」이라는 책 제목과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사물을 참되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지성을 교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책의 도입부에서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헛되고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좋다고 혹은 나쁘다고 여기는 것들이 그 자체로는 좋거나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어떤 것이 좋다고 할 때 그 자체에 그 좋음을 내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좋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이 낳은 감정이니까요.
나는 마침내 결심했다.
참된 선(善)이면서도 전파될 수 있는 것, 그리고 오직 그것만으로도 다른 모든 것이 물러나고
마음이 감응될 어떤 것이 있는지, 나아가 일단 발견하고 획득하고 나면
연속적이면서도 최고의 기쁨을 영원히 맛보게 해 줄 어떤 것이 있는지 찾아보기로 말이다.
- 위의 같은 책 중에서
위의 맨 첫머리에 소개된 '지각 방식'에 대한 문장은 스피노자가 '연속적이면서도 최고의 기쁨을 영원히 맛보게 해 줄 어떤 것'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문장입니다.
그 '어떤 것', 참된 관념에 도달하기 위해 스피노자는 우선 우리가 평소 어떻게 사물을 인식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지각 방식'이 앞에 소개된 4가지입니다.
스피노자는 이 책에서 1~3까지의 지각방식, 즉 소문이나 기호, 무작위적인 경험, 결과로부터의 추론의 방식으로는 사물의 본질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오로지 네 번째 방식만이 오류 없이 사물의 적합한 본질을 파악할 수 있다고 설파합니다.
오늘 '독서목욕'에서는 우리가 소문이나 기호, 무작위적인 경험에 휘둘리면서 오류에 빠지고 사물의 참모습을 얼마나 간과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3. 까치와 까마귀의 예
우리는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수많은 편견 속에 빠져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이 편견을 참된 관념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지성을 가로막는 장애로 지목합니다. 그 편견의 배후가 바로 소문이나 기호, 무작위적인 경험이 될 것입니다.
까치와 까마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까치를 좋은 것 - 길조(吉鳥), 까마귀를 나쁜 것 - 흉조(凶鳥)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이분법은 어디서 유래했을까요? 까치와 까마귀의 본성에 각각 좋음과 나쁨이 있는 걸까요?
까치를 길조라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문장이 있습니다.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
도시에서는 집 가까이 까치를 만날 일이 드물지만 시골에서는 까치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대문밖 느티나무에 둥지를 틀고 사는 까치들의 울음이 들리면 예전의 어르신들은 '반가운 손님이 오셨나 보네'라며 문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까치가 울면 왜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생물학자인 최재천 교수님이 어느 TV에서 소개한 까치에 대한 연구가 떠오르네요. 최 교수님은 대학 캠퍼스에 사는 까치의 생태를 학생들과 오랫동안 관찰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사는 까치는 둥지 아래를 자주 지나다니는 사람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을 향해서는 울지 않지만 낯선 사람이 등장하면 심하게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시골에서 까치가 울었다는 것은 평소 잘 안 오던 사람, 멀리 사는 친지나 가끔 오는 외판원(박물장수) 같은 낯선 이가 왔다는 신호인 것입니다. 한적한 시골에서 그런 이들은 매우 반가운 사람들이었겠네요. 이렇게 우리는 '까치가 오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말이 나오게 된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까치가 좋음(길조)의 상징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낯선 이'가 전혀 반갑지 않은 이, 예를 들어 도둑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까치가 반가운 손님을 부르는 길조'라는 우리의 생각에 오류가 있었네요. 까치는 다만 자기 영역을 지키기 위해 낯선 이의 등장에 날카롭게 반응한 것뿐이었네요. 까치는 자신이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은 까치 울음을 엉뚱하게 자신들의 삶에서 하나의 기호로 삼고 오류에 빠져 있었네요.
까마귀가 울면 재수가 없다는 말은 어떨까요? 우리가 까마귀를 흉조라고 여기는 것은 동물의 사체를 먹거나 음산한 울음소리, 온통 새까만 몸색깔 같은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에게는 '까마귀 고기 먹었느냐'라고 핀잔하기도 하고요. 이는 '까먹는다'와 '까마귀'의 발음이 비슷해서 나오게 된 말이겠지요.
까마귀에 '재수 없음' 같은 나쁨이 본성으로 내재되어 있을까요? 그렇다면 불교 국가인 부탄은 왜 국조(國鳥)를 까마귀로 삼고 신성시 여기고 있을까요? 좋음도 나쁨도 모두 사람들이 소문이나 상징, 그리고 기호 같은 편견의 창으로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요? 까마귀는 자신들의 소중한 삶을 열심히 살고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검은 고양이, 거미, 숫자 4, 보라색 ···.
소문이나 상징, 그리고 기호 같은 편견에 의해 우리가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예를 든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일상에서 이런 수많은 편견을 깨끗이 걷어내 버린다면 얼마나 홀가분한 삶이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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