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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황동규 시 기항지 1

by 빗방울이네 2024.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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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님의 시 '기항지 1'을 만납니다. 남쪽 바다의 어느 겨울 항구에 가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동규 시 '기항지 1' 읽기 

 

기항지(寄港地) 1

 

- 황동규(1938년~ , 서울)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조용한 마음으로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정박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港口)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황동규 지음, 민음사, 1975년 1쇄, 1988년 중판) 중에서

 

2.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황동규 시인님의 시 '기항지 1'은 1968년 발표된 시입니다. 시인님 30세 즈음이네요. 시인님은 끊임없이 여행하는 시인으로 유명합니다. 이 시도 여행의 과정에서 태어난 시네요. 

 

애면글면 살아가는 도시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 우리도 시인님처럼 겨울 항구로 가고 싶습니다. 탁 트인 바다와 푸른 겨울 하늘을 나는 자유로운 새를 보면 가슴이 뻥 뚫릴 것만 같습니다. 

 

시인님과 함께 겨울 항구로 가볼까요? 우리가 찾아가는 항구는 낯설수록 좋겠습니다. 처음 보는 풍경들 속에서 일상의 익숙함을 잊고 싶습니다. 

 

걸어서 항구(港口)에 도착했다 

- 황동규 시 '기항지 1' 중에서

 

항구의 마을에서 버스를 내렸을까요? 저기 항구가 보입니다. 역시 여행은 걸어야 제맛입니다. 천천히 걸어서 공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주위의 사물들을 탐색하면서 그 사물들의 언어로 말을 주고받으며, 오감을 활짝 열어 기꺼이 느끼면서 낯선 공간 속으로 들어갑니다. 사물들은 너무나 천천히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속도에 걸음을 맞추어야 합니다.  

 

길게 부는 한지(寒地)의 바람 / 바다 앞의 집들을 흔들고 

긴 눈 내릴 듯 /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지전(紙錢)에 그려진 반듯한 그림을 / 주머니에 구겨 넣고

반쯤 탄 담배를 그림자처럼 꺼버리고 / 조용한 마음으로 /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

- 황동규 시 '기항지 1' 중에서

 

걸어서 도착한 곳은 자그마한 항구 마을입니다. 바다와 집들이 가까이 있네요. 무척 추운 곳(寒地)입니다. 바닷바람이 집들을 흔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풍경은 우리에게 스산하고 쓸쓸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네요.

 

겨울 저녁의 항구입니다. '긴 눈 내릴 듯 낮게 낮게 비치는 불빛'. 마을의 불빛이 낮게 비치는 것을 보니 긴 눈이 내릴 것 같다고 합니다. 이런 기분은 왜 드는 걸까요? 그만큼 화자의 감정상태가 예민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만큼 고독하다는 뜻이겠습니다. 예민함은 고독 속에서 싹트니까요. 스산하고 쓸쓸한 마음일수록 주위의 사물에 섬세하게 반응하니까요.

 

그런 을씨년스러운 마음의 화자는 작정한 듯 '배 있는 데로 내려간다'라고 합니다. 지폐(紙錢)를 구겨 주머니에 넣고 반쯤 피우던 담배마저 꺼버리고요.

 

돈이나 담배는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물상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굶주리거나 중독되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갇혀 살았습니다. 화자는 단호한 마음으로 '구겨 넣고' '꺼버리고' 간다고 합니다. 외로운 화자가 찾으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걸어서항구에도착했다"-황동규시'기항지1'중에서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다" - 황동규 시 '기항지 1' 중에서.

 

 

3.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정박 중의 어두운 용골(龍骨)들이 / 모두 고개를 들고 / 항구(港口)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 황동규 시 '기항지 1' 중에서

 

'용골(龍骨)'은 배를 받치는 굵은 뼈대를 말합니다. 그 용골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항구의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생경한 모습에 당황한 화자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배들이 항구로 돌아왔을 때 다음날 바다로 나가기 위해 바다 쪽을 향해 정박해 있을 거라는 화자의 생각과는 반대로 '항구의 안을 들여다 보고' 있었으니까요.

 

이 구절에서 우리는 화자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상의 암울함을 털어버리기 위해서 '걸어서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바다라는 탁 트인 구체적인 공간에 서서 먼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배들의 실체를 가까이서 보게 되면 기분이 좀 나아질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화자의 예상과는 반대로 항구는 황량했고, 자유의 상징이었던 배가 아니라 '항구의 안'을 응시하고 있는 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바다로 산으로 갑니다. 그러나 거기서 만나는 것은 매번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자신이 아니었던가요? 나 말고는 나를 해방시켜 주는 이가 또 있을까요? 그래서 자유의 첫걸음은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일까요? 항구의 안을 들여다 보는 배처럼요. 

 

어두운 하늘에는 수삼개(數三個)의 눈송이 / 하늘의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

- 황동규 시 '기항지 1' 중에서

 

그래서 화자의 시선은 공중을 향합니다. 우리도 화자의 시선을 따라 공중을 향합니다. 거기 '어두운 하늘에는' 성긴 눈이 날리고 있었네요. 참으로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입니다. '수삼개의 눈송이'는 우리들인 것만 같네요.

 

시인님의 다른 시 '조그만 사랑노래'에 등장하는 '땅 어디에도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며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이 생각납니다. '수삼개의 눈송이'와 '떠다니는 몇 송이 눈'은 서로 같은 처지의 고독한 유랑자들이네요. 

 

그런데요, 그 눈송이를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라고 합니다. 새는 자유로운 이상의 상징입니다. 어두운 하늘에 날리던 몇 송이 쓸쓸한 눈발이던 우리를 누군가가 이렇게 어루만져 주는 것만 같습니다. 너를 '새들이 따르고 있었다'라고요···. 여기는 잠시 들렀다 지나가는 '기항지'일 뿐이라고요···. 그리하여 우리의 정신만은 새들처럼 아득한 밤하늘 멀리 멀리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자유롭게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황동규 시 조그만 사랑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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