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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정현종 시 견딜 수 없네

by 빗방울이네 2024.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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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종 시인님의 시 '견딜 수 없네'를 만납니다. 지금 나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현종 시 '견딜 수 없네' 읽기

 
견딜 수 없네
 
- 정현종(1939년 ~ , 서울)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시인의 그림이 있는 정현종 시선집 - 섬」(정현종 지음, 열림원, 2009년) 중에서

 

2.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정현종 시인님의 시 '견딜 수 없네'는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입니다. 2001년이니 시인님 60세 초반 즈음의 시입니다.
 
시 '견딜 수 없네'에는 '견딜 수 없네'라는 구절이 7행이나 됩니다. 전체가 20행인데 말입니다. 이 '견딜 수 없네'의 반복은 이 시의 내부로 들어가는 창문인 것 같습니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 내 마음 더 여리어져 /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 견딜 수 없네 / 흘러가는 것들을 /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시 '견딜 수 없네' 중에서

 
'견디다'라는 말은 어려운 환경에 굴복하지 않고 버티는 정신상태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견딜 수 없다'는 말은 그렇게 버틸 수 없다는 말입니다. '흘러가는 것'은 세월(日月)이며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삶에서 버틸 수 있는 것,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견딜 수 없네'는 삶의 무상(無常)함, 덧없음에 대한 자각으로 다가옵니다.
 
사람의 일들 / 변화와 아픔들을 /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 보이다 안 보이는 것 /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시 '견딜 수 없네' 중에서

 
'변화와 아픔들'이나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이라는 구절들에는 생로병사를 비롯, 우리네 삶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과 질투와 배신, 그리고 이들의 씨앗이 되는 갖가지 욕망들 말입니다.
 
시인님은 이런 것들을 '견딜 수 없네'라고 합니다. 그런데요, '견딜 수 없네'가 벌써 5번이 나오는데,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유발되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시를 자꾸 읽으면 '견딜 수 없네'라는 구절에서 어쩐지 '견디지 않겠다'라는 함의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견딘다는 것은 '변화와 아픔들'에 맞서 나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견디지 않는다는 것은 '변화와 아픔들'에 나를 던져 풀어놓고 함께 하는 것을 말하겠습니다.

이런 시인님의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일까요?
 

"일월이여견딜수없네"-정현종시'견딜수없네'중에서.
"일월이여, 견딜 수 없네" - 정현종 시 '견딜 수 없네' 중에서.

 

 

3.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

 
시간을 견딜 수 없네 / 시간의 모든 흔적들 / 그림자들 /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 정현종 시 '견딜 수 없네' 중에서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이 구절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우리는 '시간'에 대한 시인님의 문장을 만나봅니다.
 
제가 겪어본 바로는 시간은 슬픔과 동의어이고 덧없음과 동의어입니다.

- 중앙일보 기사(2001. 10.13)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자 정현종 시인의 수상소감' 중에서

 
시간의 물살에 실려서 변화하고 또 변화하면서 종래는 소멸로 가는 삶의 슬픔과 덧없음을 떠올려봅니다. 그래서 거듭 반복되는 '견딜 수 없네'라는 구절을 통해, 시간에 마모되고 사라져 가는 존재들을 안아주고 그들과 하나가 되려는 시인님의 마음이 다가옵니다.
 
'모든 흔적은 상흔이니'. 우리가 살면서 낸 흔적은 상처의 흔적이라고 시인님은 말합니다. 그 상처 입은 '아프고 아픈 것들'을 호명하는 시인님은 그 '흐르고 변하는 것들'을 당신의 큰 가슴으로 포옹해 주는 것만 같습니다.
 
이런 마음이 자연과 합일된 마음일까요? 자기의 자아로써 만물의 자아가 된 사람, 무아(無我)의 세계를 깨달은 사람은 자신의 탐욕에 집중하지 않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봅니다. 자기가 외따로이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세계와 함께 연기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삶의 덧없음을 말할 때 이 '덧'은 얼마 안 되는 아주 짧은 시간을 말합니다. 삶에는 그런 짧은 시간조차 머물지 않고 흘러가 버리네요. 시 '견딜 수 없네'는 그렇게 덧없는 것이 삶인데, '흐르고 변하는 것' '아프고 아픈 것'을 외면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나'의 욕심에만 머물러 있느냐고 어깨를 툭 치는 것만 같습니다.
 
제가 겪어본 바로는 개인에서부터 크고 작은 집단/기관을 거쳐 국가에 이르기까지
권력욕이 있는 사람들(그런 사람들 때문에 더불어 겪는 괴로움을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은
역사 지향적이고 역사를 독점하려고 하는 반면
가령 시(예술)를 쓰는 사람은 시간 지향적이고 시간의 핵심인 덧없음에 민감합니다 
(그리고 역사가 비교적 용서 없이 진행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문학은 또한 용서의 한 형식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들은 역사를 독점하시오, 나는 덧없음을 독점하겠습니다 ···

- 위 기사의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자 정현종 시인의 수상소감' 중에서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정현종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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