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초동일'을 만납니다. 입동 무렵, 초겨울날의 시골 풍경을 그린 시입니다. 시인님이 그려주신 정겨운 풍경 속으로 우리 함께 들어가 시인님의 시선으로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면서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초동일' 읽기
초동일(初冬日)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흙담벽에 볕이 따사하니
아이들은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
돌덜구에 천상수(天上水)가 차게
복숭아나무에 시라리타래가 말러갔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년 1쇄, 2019년 32쇄) 중에서
2. '흙담벽에 볕이 따사하니'
시 '초동일(初冬日)'은 1936년 1월 발간된 백석 시인님의 유일한 시집 「사슴」에 게재되어 세상에 발표된 시입니다.
'초동일(初冬日)'은 '초겨울날' 또는 '첫 겨울날'을 말합니다.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立冬)'과 유사한 시간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입동이라면 11월 8일 즈음입니다.
가을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시간, 백석 시인님이 본 우리의 시골마을에서는 어떤 풍경이 펼쳐지고 있을까요?
흙담벽에 볕이 따사하니 / 아이들은 물코를 흘리며 무감자를 먹었다
- 백석 시 '초동일' 중에서
흙담은 흙과 짚을 물로 이겨서 쌓은 담입니다. 흙담벽은 흙담과 같은 말이지만 차이가 느껴집니다. 흙담이라고만 했을 때보다 흙담벽이라고 했을 때 초겨울의 햇볕이 벽면을 따스하게 데우고 있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촉각적으로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는 유추를 하기에 흙담벽은 안성맞춤입니다. 눈을 감고 떠올려봅니다. 초겨울날 양지바른 흙담벽에 기대어 햇볕바라기를 하는 아이가 되어서요. 등이 따뜻해지네요. 시멘트벽이 아니라 흙담벽이었기에 얼마나 더 따뜻하고 부드러웠을까요?
'물코'. 생각만 해도 저절로 웃음이 나네요. 물처럼 흐르는 콧물이네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면서 특히 아이들은 갑자기 낮아진 기온에 적응하지 못해 감기에 잘 걸리곤 합니다. 아이는 기다랗게 흐르고 있는 콧물이 흘러내리지 않게 간헐적으로 숨을 들이키고요, 그때마다 콧물 줄기는 마법처럼 콧속으로 빨려 들어가고요. 조만간 그 콧물이 마르면 하얀 고속도로 2차선이 아이의 코밑에 나란히 생기겠네요.
'무감자'. '물감자' 또는 '고구마'를 말합니다. 겨울이니 가을에 캐낸 고구마였겠네요. 이즈음 시골아이들의 간식거리는 생고구마입니다. 겨울 양식으로 저장해 둔 생고구마를 엄마 몰래 꺼내와 먹고 있었을까요? 벼가 가득 들어 빵빵해진 가마니 표면에 생고구마를 쓱쓱 비비면 껍질이 잘 벗겨집니다. 겨울이니 고구마의 속도 차갑습니다. 달고 찬 맛, 대지의 기운과 태양의 기운이 가득 맺혀 있는 보약 같은 생고구마입니다.
'따사하니'는 1행에서 2행으로 건너가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네요. '따스하여'로 새기지만, 그런 느낌만 안고 '따사하니'를 살려 읽어야 시의 맛이 한층 깊어짐을 느낍니다.
이 아이들 말입니다. 들판으로 산으로 노루처럼 뛰어다니며 차가워진 대기를 온몸으로 호흡하고, 흙담벽에 스민 태양의 따스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자연의 힘이 잉태한 고구마로 몸과 마음의 허기를 채우던 이 아이들요, 가까이 가서 꼭 껴안아 주고 싶네요.
3. '돌덜구에 천상수가 차게'
돌덜구에 천상수(天上水)가 차게 / 복숭아나무에 시라리타래가 말러갔다
-백석 시 '초동일' 중에서
시인님의 카메라는 아이들에서 돌절구(돌덜구)로 옮겨갑니다. 아이들이 햇볕바라기를 하고 있는 마당 한편에 돌절구통이 있었네요. 돌을 정으로 쪼아 파내서 만든 절구통입니다. 도시의 돌절구는 카페 입구에 앉아서 여름 수련을 피우곤 하지만, 시골에서는 곡식을 찧고 찰떡도 찧고 생강이나 마늘도 찧는 집안의 보물입니다. 요즘 믹스기가 하는 일들을 이 돌절구가 했다고 보면 되겠네요.
그 돌절구, 지난 가을날에는 꽤나 바빴습니다. 이제 겨울로 접어들면서 농부들이 한가해져 돌절구도 할 일이 별로 없나봅니다. 그래서 고여있던 빗물도 치워지지 않고 그대로 있네요. 빗물을 천상수라 한 시인님의 마음은 얼마나 깊고 깊은지요? 천상수에는 어떤 경이로움, 신비로움이 들어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아주 귀한 물이어서 더 아껴야 할 것 같은 느낌도요.
'차게'는 '차가워지도록'으로 새깁니다. 돌절구에 고인 천상수는 점점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날이 점점 추워지고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돌절구에 손을 한번 넣어보고 싶어지네요. 그 돌절구의 천상수에는 구멍이 송송 뚫린 감나무 이파리도 몇 개 떠다니고 있겠지요?
시인님의 카메라는 돌절구에서 복숭아나무로 옮겨가네요. '시라리타래'는 '시래기 타래'를 말합니다. 무청이나 배추 이파리를 새끼에 엮어서 복숭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말리고 있네요. 시래기는 야채가 귀한 겨울의 시골에 중요한 먹거리입니다. 된장 시래깃국도 되고 시래기 볶음 같은 반찬도 되지요.
천상수는 점점 차가워지고, 시래기는 점점 더 말라가는 시간이네요. 보통 사람들은 천상수가 차가워지고 시래기가 마르는 일을 별도의 일로 보지만 시인님은 연결시켜 보았네요. 외따로이 존재하는 줄로만 알았던 사물들이 시인님의 세계에서 이처럼 다정하게 서로 마주보며 존재하고 있었네요.
그 풍경 속으로 조만간 직박구리들이 찾아와 천상수로 반갑게 목을 축이다가 차가워 몸을 으스스 털고, 사람들은 바싹 마른 시래기를 다시 물에 풀어 구수하고 다디단 저녁 된장국을 끓이겠지요.
'초동일(初冬日)'에 그렇게 연결된 사물들, 생명들은 조금은 긴장한 눈빛으로 겨울의 시공간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먼 기억 속의 일처럼 참 고요하고 고요하네요. 마음이 따스해지고 투명해지는 것만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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