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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가을날

by 빗방울이네 2023.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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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님의 시 '가을날'을 만납니다. 이 시에는 어떤 삶의 풍경이 들어있을까요? 함께 읽으며 시인님의 경건하고 간절한 기도 속으로 들어가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가을날' 읽기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 체코 프라하)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이게 해 주소서.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소요할 것입니다.
 

- 「마음을 흔드는 세계 명시 100선」(장석주 엮음, 북오션, 2017년) 중에서

 

2. '주여, 때가 왔습니다'

 
릴케 시인님의 시 '가을날'은 1902년에 쓰인 시입니다. 시인님 28세 때입니다.  
 
「릴케의 고통의 해석과 인문학 - 복면을 한 운명」(김재혁 지음, 고려대학교 출판부, 2014년)에 따르면, 평생 방랑의 삶을 살다간 릴케 시인님은 이 시를 쓸 당시 결혼을 한 상태에서 '남편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부담과 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소명의식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기였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시 '가을날'에는 그 당시 시인님의 고뇌가 스며있겠네요. 그 심정을 헤아려보면서 시를 만나봅니다.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당신의 그림자를 태양 시계 위에 던져 주시고, / 들판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가을날' 중에서

 
이 첫 구절은 참으로 담대하네요. 정신의 주름이 활짝 펴지면서 우리의 상상력이 온 우주로 확장되는 것만 같습니다. 첫 구절은, 그리하여 자연의 섭리가 절대자에 의해 주관되고 있다는 것을 뚜렷이 인식하게 하네요.  
 
돌이켜보면 지난여름은 얼마나 뜨거웠습니까? 그 뜨거움은 만물을 성숙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시인님은 그런 신의 조화가 '참으로 위대'했다고 경탄하고 칭송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당신의 그림자'를 던져 태양을 가려서 뜨거운 여름을 거두고 '바람을 풀어놓아' 서늘하게 해 달라는 소망을 빕니다.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명해 주시고, / 그들에게 이틀만 더 남국의 나날을 베풀어 주소서.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 무거운 포도송이에 마지막 감미로움이 깃들이게 해 주소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가을날' 중에서

 
이렇게 자연의 모든 존재는 절대자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 성숙할 수 없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시인님은 '마지막 열매들이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이토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네요. 우리는 열매들의 성숙을 빌면서 시인님 자신의 내면의 성숙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인님도 '마지막 열매'의 일원입니다. 우리도 그렇겠고요. 시인님은 '탐스럽게 무르익도록', 열매들이 무르익듯이 저마다의 내면이 성숙할 수 있도록 '명해 주시고', '재촉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시인님의 간절함이 느껴지네요.
 
여름이 지나가버린다면, 남국의 강렬한 햇빛이 없다면 열매들이 단맛을 완성할 수 없듯이, 시인님의 시간도 지나가면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느껴집니다. 이런 시인님의 간절함에 동화되어 우리 마음도 간절해지네요.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 릴케 시 '가을날' 중에서

 

 

3.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고 / 나뭇잎이 굴러갈 때면, 불안스레 / 가로수 길을 이리저리 소요할 것입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을날' 중에서

 
지금 '남국의 나날'의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면,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할 것이고,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홀로여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깊어가는 '가을날'의 밤에 잠자리에서 뒤척이다 '깨어서 책을 읽고, 길고 긴 편지를' 쓰거나, 거리를 헤매어 다니며 저마다의 고독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할 것이라고도 하네요.
 
시인님은 그렇게 자신이 방황하지 않도록 신께 간구하고 있지만,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이미 예견하고 있습니다.
 
불투명한 장래, 그리하여 불안한 현실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가 시인님에게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결국 혼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감내하며 방랑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시인님은 아프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 인식 가운데 시인님의 깊은 고독과 담담한 체념, 그리고 부단한 내적 성숙을 위한 다짐이 느껴지기도 하네요.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가로수 길을 산책하는 일은 바로 외로운 릴케 시인님의 삶이었다고 합니다. 이 대목을 찬찬히 음미하니 우리 마음도 아릿하게 아파오네요. 이 쓸쓸한 가을날엔 누구라도 시인님처럼 고독하지 않겠는지요? 그대는 어떤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님의 시 '묘비명'을 만나 보세요.

 

릴케 묘비명 장미여 읽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인님의 묘비명을 읽습니다. 이 묘비명은 릴케 시인님이 죽기 1년 전에 써둔 것입니다. 평생 삶의 비의를 들여다보며 살아온 시인님이 전해주는 삶의 통찰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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