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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정주성

by 빗방울이네 2024.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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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정주성'을 만납니다. 이 땅에 살다갔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정주성' 읽기

 
정주성(定州城)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산(山)턱 원두막은 뷔였나 불빛이 외롭다
헝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성(城)터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한울빛같이 훤하다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07년 1쇄, 2019년 32쇄) 중에서

 

2. '헝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시 '정주성(定州城)'은 백석 시인님의 데뷔 작품입니다. 시인님은 1930년 19세 때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로 당선해 소설가로 등단했고, 5년 뒤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시단에 데뷔했습니다.
 
지면에 발표된 시로는 '정주성'이 시인님의 첫 시입니다. 첫 시의 소재가 시인님 고향 정주에 있는 옛성 '정주성'이었네요. 정주에는 이승훈 님이 세운 오산학교가 있었고, 백석 시인님도 김소월 시인님도 이곳을 다녔습니다.
 
24세의 청년 백석의 안내로 정주성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 시의 발표일이 8월 30일이니 시의 배경은 여름입니다. 정주성엔 어떤 사연이 스며 있을까요?
 
산(山)턱 원두막은 뷔였나 불빛이 외롭다 / 헝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백석 시 '정주성' 중에서

 
한창 과일이 영그는 여름입니다. 이 때는 저마다 과수원에 원두막을 짓고 과일을 지킵니다. 과일을 지키는 여름밤의 원두막에 인기척은 없고 불빛뿐이네요. 그래서 원두막이 '뷔였나'(비었나) 하고 시인님은 생각합니다. '비었는지'라는 평이한 서술 대신 '뷔였나'라는 고어체의 의문문이 등장했는데요, 시인님이 '뷔였나?' 하면서 원두막을 기웃거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네요.
 
백석 시인님의 시 중 절창 한 구절 등장입니다. '헝겊심지에 아즈까리 기름의 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문장에는 얼마나 깊은 적막이 들어있는지요? 사기그릇에 아주까리기름을 채워 헝겊으로 된 심지 끝에 불을 밝혀 놓았네요. 불이 타면서 기름이 점점 졸아들겠지요? 얼마나 조용한 밤이었으면, 그 졸아드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하네요. 시인님은 그 여름밤의 외로움과 적막함을 이리 소소한 사물들을 통해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해 주네요.
 
이리 외롭고 고요한 분위기를 잔뜩 조성해 두고 시인님은 무얼 말하려는 걸까요? 
 
잠자리 조을든 문허진 성(城)터 / 반딧불이 난다 파란 혼(魂)들 같다 
어데서 말 있는 듯이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

- 백석 시 '정주성' 중에서

 
시인님은 무너진(문허진) 성터에 있습니다. 바로 정주성이네요. 산턱 원두막을 바라보던 시인님의 시선은 이제 성터로 옮겨왔네요. 무너진 성터는 잠자리가 졸고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조용한 곳이라 하고요, 반딧불이가 날아다닌다고 하는데요, 시인님은 그것이 '파란 혼(魂)들 같다'라고 하네요. 
 
왜 그렇게 보였을까요?
 
바로 이곳 정주성에서 무려 2,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홍경래의 난으로 불리는 농민항쟁입니다. 1811년 지방 차별과 정부의 부패에 저항하며 일어난 백성들이 이곳 정주성에서 관군과 마지막 혈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4개월 가까이 버티면서요. 결국 관군이 땅굴을 파고 성을 폭파했고, 성 안에 있던 반란군들, 사회적 모순에 항거하던 사람들은 모두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시인님은 무너진 정주성의 성터에서, 120년 전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현장에서 죽어간 백성들, 고향사람들의 넋들을 떠올렸네요. 반딧불이가 그들의 파란 혼들 같다고 하는데, 죽어가면서 서럽게 울부짖었을 사람들의 비명을 듣고 있었을 것만 같네요.
 
'어데서 말 있는 듯이'. 이 구절은 '어데서 할 말 있는 듯이'라는 의미로 다가옵니다. '파란 혼들'이 자신들의 억울함과 분노를 전해주고 싶었을까요? '크다란 산(山)새 한 마리 어두운 골짜기로 난다'라고 하네요. 백성들은 그때 죽어 이 '어두운 골짜기'에 묻혔을까요? 이 모든 것은 시인님의 마음이니 이런 시인님의 마음은 얼마나 깊고 높은 마음인지요.
 

"청배를팔러올것이다"-백석시'정주성'중에서.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 백석 시 '정주성' 중에서.

 

 

3.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 한울빛같이 훤하다 / 날이 밝으면 또 메기수염의 늙은이가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 백석 시 '정주성' 중에서

 
'훤하다'는 '조금 흐릿하게 밝다' 또는 '앞이 탁 트여 매우 넓고 시원스럽다'는 뜻입니다. '헐리다 남은 성문(城門)이' 확 트여 넓고 시원스럽다는 뜻으로 새겨봅니다. 그것이 하늘빛 같다고 합니다. 밤이라서 '흐릿하게 밝은' 하늘빛일까요? 
 
'헐리다 남은 성문'은 역사의 상흔(傷痕)입니다. 시인님은 그 아픔 위로 펼쳐진 훤한 하늘빛을 보여줍니다. 처음 성터에서 원두막을 보던 시인님의 시선은 성터의 반딧불이로 옮겨갔다가 다시 헐리다 남은 성문을 통과해 지금은 하늘을 향해 있습니다. 하늘처럼 훤한 세상을 말입니다. 그 상흔 위에 선 시인님은 아픔을 거름으로 꽃 피워진 일들을 생각했을까요?
 
이 시에서 가장 돋보이는 시어가 나옵니다. '청배'. 마지막에 등장한 '청배'가 이 시를 높은 곳으로 올려주고 있습니다. 
 
청배는 껍질이 푸릇한 배입니다. 나무에 달린 배를 감싸는 종이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재질이 일반종이로 배를 감싸면 빛과 열이 잘 투과해 배가 광합성을 활발히 해서 껍질이 푸르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도도 높고요. 노란 배는 착색지를 세 겹으로 감싸 빛과 열을 많이 차단한 산물이라고 합니다. 과거에는 대부분 청배였는데 선물용이나 차례상용으로 보기에 좋은 노란 배가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하네요.
 
시가 발표된 때가 8월 30일이었으니 추석이 다가오는 즈음이었겠네요. 감도 익어가고 청배도 사과도 익어가는 시간이네요. '메기수염의 늙은이'. 메기수염처럼 몇 오라기만 양쪽으로 길게 기른 수염을 한 늙은이입니다.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기도 하고요, 멋을 부리려 애쓰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정답기도 한 우리네 이웃이네요. 
 
'메기수염의 늙은이'는 성터를 오르내리느라 목마른 사람들을 대상으로 달고 시원한 청배를 파는 사람인가 봅니다. '날이 밝으면 또 ~ 청배를 팔러 올 것이다'. 삶이란 아픔을 딛고 이렇게 면면히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달고 시원한 청배는 그 본연의 맛을 대대로 이어갈 것입니다. 누가 청배로부터 그 달고 시원한 맛을 빼앗아갈 수 있겠는지요? 이 시가 나온 때는 1935년 일제 강점기입니다. 청배의 맛을 아무도 뺏어갈 수 없듯이 불의 앞에 횃불을 드는 우리의 혼, 누구도 뺏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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