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수 시인님의 시 '새 1'을 만납니다. 사물의 순수와 본질에 다가가려는 시인님의 고뇌를 느낄 수 있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남수 시 '새 1' 읽기
새 1
- 박남수(1918~1994, 평양)
1
하늘에 깔아논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속삭이듯 서걱이는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쭉지에 파묻고
다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2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3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한국현대시문학대계21 「박남수 김종한」(지식산업사, 1982년) 중에서
2.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박남수 시인님의 시 '새 1'은 1959년 「신태양」에 발표된 후 제3시집 「신의 쓰레기」(1964년)에 수록된 시입니다.
'새 1'을 읽어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이 시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가진, 다면체 다이아몬드 같은 시입니다.
하늘에 깔아논 / 바람의 여울터에서나 / 속삭이듯 서걱이는 / 나무의 그늘에서나, 새는
노래한다. 그것이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 새는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두 놈이 부리를 / 서로의 쭉지에 파묻고 / 다스한 체온(體溫)을 나누어 가진다
- 박남수 시 '새 1' 중에서
'새는' '노래인 줄도 모르면서' 노래하고 '사랑인 줄도 모르면서' 사랑한다고 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언뜻 새는 까닭이나 영문을 모르고, 멋모르고 노래하거나 사랑하는 무지한 '놈'이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새가 그럴 리가 있겠는지요.
그럼, 무슨 의미일까요?
새가 노래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의 언어에 포획된 개념입니다. 새의 입장에서 '노래한다' '사랑한다'는 개념이 있을까요? 새의 행동은 인간의 개념에 젖지 않고 자연스러운 욕구에 의해 이루어진 행동입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 바로 다른 것의 섞임이 없는 '순수(純粹)'입니다.
우리는 이로써 시인님이 이 시에서 '순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리와 의미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은 언어의 특성을 말하는 '언어의 자의성(恣意性)'이 떠오릅니다. 어떤 하나의 순수한 '의미'에 얼마나 다양한 인종들의 다양한 소리가 편의적 또는 자의적으로 덧입혀져 있을까요?
시인님은 그 순수를 가리고 있는 얼룩을 벗기고 그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속에는 의도하거나 꾸미지 않고 목적이나 욕망에서 해방된 대상(새)의 지순(至順)한 모습, '순수'가 있을 테니까요.
'두 놈이 부리를 서로의 쭉지에 파묻고 다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진다.' 그런 생각으로 이 구절을 읽으니, 이 '두 놈'의 순수한 사랑이란 얼마나 절실하고 따뜻한 것인지요. 이 사랑은 우리가 부르는 '사랑'이라는 형식과 가식의 그림자를 벗은 순수한 행위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새는 울어 / 뜻을 만들지 않고 / 지어서 교태로 / 사랑을 가식(假飾)하지 않는다
- 박남수 시 '새 1' 중에서
'뜻을 만들지 않고'. 여기서의 '뜻'은 형식화된 개념일 것입니다. 그저 울고 싶을 뿐 의도나 목적이 있는 울음이 아니라는 말이네요. 울음에서 어떤 슬픔이나 기쁨을 떠올리는 것은 인간들의 사고행위일 것입니다.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사랑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가식과 가면을 쓰고 있는지, 시인님은 말하는 것만 같네요. 새들의 사랑은 억지스러운 교태로 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속으로부터 저절로 우러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런 행위란, 바로 무위(無爲)일까요?
'무위'는 어떤 이해관계에서 오는 욕망이나 집착이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입니다. 육체적으로 행동을 안 하는 것이 무위가 아니라 하려는 의도가 없는 경지의 행위가 무위입니다. 바로 자연 그대로의 끌림, 자연의 법칙에 따른 순수한 행동이네요. 참으로 진실함 그 자체의 순수입니다.
3.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 박남수 시 '새 1' 중에서
'포수'. 여기서 등장하는 '포수'는 '순수를 겨냥'하는 인물입니다. '순수' 또는 '본질'에 다가가려고 하고, 획득하려고 하는 인물요.
그가 획득하는 것은 매양 순수나 본질이 아닌 순수의 그림자('피에 적은 한 마리 상한 새'), 즉 자의적으로 덧입혀진 왜곡된 의미일 뿐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순수는 세속적인 방법('한 덩이 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네요.
과연 우리는 사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사물의 본질에 얼마나 많은 상징과 기호와 개념이라는 옷을 입혀놓았을까요? 그것은 또 얼마나 본질과 다른 얼룩/오류들로 두껍게 덮여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는 사물의 본질/순수를 결코 포획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포수)는 개념화된 언어의 총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총으로 사물의 본질/순수에 다가가려고 하는 순간(아니 그 이전에) 이미 우리의 오발탄은 순수를 쏘지 못하고 매번 빗나갈 수밖에 없도록 예정된 삶 속에 살고 있지 않은지요? 이처럼 순수나 본질은 얼마나 다다르기 힘든 것인지요?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 김춘수 시 '꽃을 위한 서시' 중에서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이 두 구절은 다른 표현 같은 구절로 들립니다. 우리의 주관이 개입된 인식으로는 결코 사물의 본질/순수를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 '새 1'과 '꽃을 위한 서시'를 쓴 시인님들의 고뇌는 같은 몸부림으로 다가옵니다.
시인님들은 평소 우리가 얼마나 왜곡된 렌즈로 사물을 보는 지 말하고 있네요. 어떻게 해야 우리는 순수에 가 닿을 수 있을까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박남수 시인님의 시와 김춘수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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