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자류(柘榴)'를 만납니다. 가만히 석류의 성정(性情)을 떠올리며 저마다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자류(柘榴)' 읽기
자류(柘榴)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남방토(南方土) 풀 안 돋은 양지귀가 본이다
해ㅅ비 멎은 저녁의 노을 먹고 산다
태고(太古)에 나서
선인도(仙人圖)가 꿈이다
고산정토(高山淨土)에 산약(山藥) 캐다 오다
달빛은 이향(異鄕)
눈은 정기 속에 어우러진 싸움
▷백석 시집 「사슴」(1936년 오리지널 디자인, 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중에서.
2. 석류의 원산지와 아름다움에 대하여
백석 시인님의 시 '자류(柘榴)'는 시집 「사슴」에 실린 33편 가운데 가장 논쟁적인 시로 꼽힙니다.
시 속에 담긴 뜻을 찾아 나섰다가 그만큼 길을 잃기 쉬운 시입니다.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
▷「백석전집」(김재용 엮음, 실천문학사, 1997년)의 백석 평문 '나의 항의 나의 제의' 중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 '자류(柘榴)'는 이중 '특이한 시'에 속할까요?
논쟁적인 시라는 것은 시 속으로 가는 길이 여러 갈래라는 뜻이겠지요?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을 따라 시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국어사전에 '자류(柘榴)'는 '석류(石榴)의 비표준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일본어사전에 보니 석류나무를 '자류(柘榴)'는 '석류(石榴)'로 칭한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 일본어사전에 나오는 '자류구(柘榴口)'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네요. '에도시대의 공중 목욕탕 안 욕조 출입구'를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물이 식지 않도록 위를 판자를 덮었기 때문에 몸을 굽히고 들어갔다고 하네요.
그 모양새를 가만히 떠올려보니, 공중 목욕탕 안의 '자류구(柘榴口)'를 지나면 목욕하느라 벗은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는 풍경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뽀얗게 빛나는 석류알처럼요.
여러 정황으로 보아, 백석 시인님의 시 '자류(柘榴)'는 석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새깁니다.
'남방토(南方土) 풀 안 돋은 양지귀가 본이다 / 해ㅅ비 멎은 저녁의 노을 먹고 산다'
이 1연의 1행은 석류의 원산지('본'), 2행은 꽃의 아름다움에 대한 진술로 다가옵니다.
석류의 원산지는 페르시아입니다. 이란 동부 고원에서 서부 히말라야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햇빛이 많고 건조한 고장입니다.
'양지'는 볕이 바로 드는 곳, '귀'는 모서리를 뜻하므로 '양지귀'는 '햇살이 잘 드는 가장자리'로, '본'은 국어사전에 나온 대로 '시조(始祖)가 난 곳'으로 새깁니다.
그러면 1행의 '남방토 풀 안돋은 양지귀가 본'이라는 구절이 가슴으로 쑥 들어오네요.
'해ㅅ비 멎은 저녁의 노을 먹고 산다'. 이 구절에서 석류의 아름다운 꽃이 떠오릅니다.
석류 꽃은 홍색입니다. 아주 빨갛지 않은 홍색은 곱디고운 저녁노을을 떠올리게 하는 색입니다.
석류는 그런 저녁노을을 먹고 살아서 저녁노을 같은 빛깔의 예쁜 꽃을 피운다는 말이네요.
그것도 '햇비' 멎은 후에 깔리는 저녁노을 말입니다. '햇비'는 해와 비가 합쳐진 단어이니 해가 날 때 내리는 비, 여우비를 말할까요?
또는 접두사 '햇~'을 '당해에 난'의 뜻으로 새기면, '햇비'는 장맛비나 찔끔찔끔 내리는 잦은 비가 아니라 아주 오랜만에 내린, 기다리던 단비라는 뉘앙스도 주네요.
그렇게 오랜만에 내린 '햇비'가 공중의 먼지를 씻어내려서 그 비가 그치고 끼는 노을은 빛도 곱겠지요?
그런 고운 저녁노을 먹고 사니 석류꽃은 얼마나 고울까요?
3. 절에서 불화(佛畵)를 보고 있을까요?
'태고(太古)에 나서 / 선인도(仙人圖)가 꿈이다 / 고산정토(高山淨土)에 산약(山藥) 캐다 오다'
얼마나 오래 전부터 재배되었는지 석류는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경전에 모두 등장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님은 지금 석류나무가 서 있는 어느 절에서 불화(佛畵)를 보고 있을까요?
'선인도(仙人圖)가 꿈이다'. '선인도'는 신선이 등장하는 그림을 말합니다.
절의 한적한 곳에 위치한 산신각에 들어가면 정면 벽에 산신도가 있습니다. 깊은 산속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백발의 노인 모습을 한 산신과 호랑이가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 그림 속에는 산신에게 공양물을 바치는 동자나 동녀가 등장합니다. 그 공양물의 하나가 바로 석류입니다. 천도복숭아나 산삼과 함께요.
산신에게 석류를 공양물로 바치는 것은 석류가 풍요와 다산(多産), 그리고 불사(不死)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산신도를 보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동자나 동녀를 통해 산신에게 석류를 바치며 풍요와 다산, 불사를 염원하는 구도입니다.
석류의 꿈은 이렇게 산신에게 바쳐지는 신성한 공양물이 되어 가난하고 소외되고, 외롭고 서러운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는 것일까요?
'고산정토(高山淨土)에 산약(山藥) 캐다 오다'. '고산정토(高山淨土)'라는 구절에서 석류의 원산지 페르시아 고원이 떠오르네요. 히말라야 말입니다.
석류에 모든 과일의 영양이 다 들었다고 믿는 이란 사람들은 석류를 '과일의 임금'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만큼 약효가 뛰어나다고 하고요.
과피에는 수렴(收斂), 지혈, 지사, 구충의 효능이 있어
한방에서는 구사리(久瀉痢, ※오랜 설사병), 빈혈, 대하(帶下, ※여성 질병), 붕루(崩漏, ※여성 질병),
탈항(脫肛), 충적복통(蟲積腹痛, ※기생충이 배에 몰려 아픈 증상), 회충 구제 등에 쓰이고,
민간에서는 천식, 백일해(※경련성 기침을 일으키는 어린이의 급성 전염병)에 석류 껍질과 감초를 섞어 달여 마신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2」(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석류나무' 중에서(※는 편집자 주)
석류는 '고산정토(高山淨土)'에 살면서 이런 약효를 '산약(山藥)'처럼 몸에 지니게 되었네요.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말입니다.
이 2연은 앞의 1연에서 꽃이 피어나 열매가 익기까지의 시간을 묘사한 것으로 새겨봅니다.
'달빛은 이향(異鄕) / 눈은 정기 속에 어우러진 싸움'
'이향(異鄕)'은 고향이 아닌 타향을 말합니다.
1연의 1행에서 '양지귀가 본'이라는 구절에서 나왔듯이 석류의 '본(本)'은 햇빛입니다.
'달빛은 이향(異鄕)'. 달빛은 달에 반사된 햇빛입니다. 달빛이 아니라 그 '본(本)'인 햇빛을 지향하는 것이 석류의 본성일까요?
'눈은 정기 속에 어우러진 싸움'. 이 구절에서는 석류의 열매가 떠오르네요. 열매 껍질 속에 꽉 들어차 있는 알갱이들 말입니다.
석류는 완전히 익으면 껍질이 저절로 불규칙하게 터져 그 안의 종자(알갱이)들이 드러나 보입니다.
그 알갱이들이 반짝이는 생명의 '눈'인 것만 같습니다.
'정기(精氣)'는 생기 있고 빛이 나는 기운을 말합니다. 천지 만물을 생성하는 원천이 되는 기운입니다.
'눈은 정기 속에 어우러진 싸움'. 이 구절에서 스스로 껍질을 찢고 앞다투어 세상 밖으로 나오려는 석류 알들의 충일(充溢)한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지네요.
이런 원초적 '싸움'으로 생명은 태어나고 또 다시 열매를 맺으며 내내 이어지겠지요?
이제 시 '자류'가 가슴으로 오는 것 같습니다.
햇빛을 자양분으로 고산정토에서 산약의 기운을 담아 서럽고 외로운 사람들의 기원을 들어주는 석류 이야기네요.
그런 높고 깊은 성정(性情)의 석류를 보면서 시인님은 앞으로 헤쳐갈 삶의 길, 시의 길을 생각했을 것 같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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