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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남조 시 가을 햇볕에

by 빗방울이네 2024.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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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인님의 시 '가을 햇볕에'를 만나 봅니다. 가을 햇볕 아래에서 눈물을 말리고 싶은 시입니다. 그리움과 쓸쓸함을 고슬고슬하게 말리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남조 시 '가을 햇볕에' 읽기

 

가을 햇볕에

 

김남조(1927~2023, 경북 대구)

 

보고 싶은 너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음악이 되네

 

말은 없이

그리움 영글어서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못해

가슴 찢고 나르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 되고

바람 속에 몸을 푸는

갈숲도 되네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나는 더욱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은 쌓여서

낙엽이 되네

 

아아 저녁 해를

안고 누운

긴 강물이나 되고 지고

보고 싶은 너

이 마음이 저물어

밤하늘 되네

 

▷ 「김남조 시전집」(오세영 최동호 이숭원 편집, 국학자료원, 2005년) 중에서

 

2. 가을 햇볕에 그대 마음도 익어가는 중이겠지요?

 

시 '가을 햇볕에'는 1967년 간행된 김남조 시인님의 제6시집 「겨울바다」에 실린 시입니다.

 

시인님 40세 즈음의 시네요.

 

제목이 '가을 햇볕에'인데, 문득 '햇빛'과 '햇볕'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지네요.

 

국어사전을 보니 햇빛은 '해의 빛', 햇볕은 '해가 내리쬐는 기운'이라고 구분하고 있네요.

 

그러니까 햇볕은 '뜨거운 기운'이라는 점에 방점이 찍혔네요.

 

일례로 '햇볕을 쬔다'라고 할 때는 햇볕의 뜨거운 기운을 몸에 받는다는 뜻이겠네요.

 

이렇게 가을의 열매들을 뜨거운 기운으로 익혀주는 가을 햇볕은 얼마나 보약인지요?

 

누구에게라도 한량없이 퍼주는 가을 햇볕, 많이 많이 쬐어야겠네요.

 

이런 가을 햇볕의 온도와 질감을 안고 시 속으로 들어갑니다.

 

'보고 싶은 너 /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 음악이 되네'

 

시인님이 간절히 '보고 싶은 너'에게 쓰는 편지를 펼쳐 읽는 느낌입니다.

 

'가을 햇볕에 이 마음 익어서'. 이 구절을 읽으니 아래 시가 떠오릅니다.

 

따거운 볕 / 초가을 햇볕으론 /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 작고 목 말러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 내가 익는다 /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

- 박두진 시 '하늘' 중에서

 

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가을 하늘을 마시면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는 말은 얼마나 우리를 아득하게 하는지!

 

이 가을, 누구라도 가을 햇볕과 가을 하늘에 마음이 익어가고 있겠지요?

 

'음악이 되네'. 그리움으로 가득한 시인님의 마음은 가을 햇볕에 익어서 하염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가을 햇볕 아래를 어정거리며 시인님은 고독과 우수에 찬 선율을 타고 흐르고 있었을 것만 같습니다.

 

'말은 없이 / 그리움 영글어서 / 가지도 휘이는 열매,

참다못해 / 가슴 찢고 나르는 비둘기 떼들

들꽃이 되고 / 바람 속에 몸을 푸는 / 갈숲도 되네'

 

'보고 싶은 너'를 향한 애절한 마음은 가을 햇볕에 익어서 만물 속으로 스며드네요.

 

'가지도 휘이는 열매'. 따가운 가을 햇볕을 어쩌지 못하고 그리움은 영글대로 영글어서 '나'를 휘청거리게 합니다.

 

'참다못해 가슴 찢고 나르는 비둘기 떼들'. 얼마나 그리우면, 그리움 가득한 가슴 찢고 비둘기 떼처럼 날아오르고 싶을까요?

 

아무리 기다려도 '보고 싶은 너'는 오지 않았나 봅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외로운 '들꽃'이 되고, 바람에 마른 꽃잎 흩날리는 다 해진 갈숲이 될 때까지요.

 

"가을_햇볕에_눈물도_말려야지_가을_햇볕에_나는_더욱_사랑하고_있건만_말은_없이_기다림은_쌓여서_낙엽이_되네"-김남조_시_'가을_햇볕에'_중에서.
"가을 햇볕에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나는 더욱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은 쌓여서 낙엽이 되네" - 김남조 시 '가을 햇볕에' 중에서.

 

3. 그대도 가을 햇볕에 눈물을 말리고 있는 중이겠지요?

 

'가을 햇볕에 / 눈물도 말려야지

가을 햇볕에 / 나는 더욱 사랑하고 있건만

말은 없이 기다림은 쌓여서 / 낙엽이 되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가을 햇볕은 마음도 익혀주었으니 가을 햇볕은 눈물도 말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가을 햇볕 아래에서 그리운 이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눈물을 다 말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시에서 '말은 없이'가 두 번 등장합니다.

 

그리운 이를 한없이 그리워하는 '나'가 말을 잃었다는 느낌, 그리운 이로부터 아무 대답이 없다는 느낌이 겹쳐지면서 시 속의 애상감이 더 진해지네요.

 

'기다림은 쌓여서 / 낙엽이 되네'. 이 구절은 깊은 허무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네요.

 

'가지도 휘이게 하는 열매' 같은 감당할 수 없는 기다림은 쌓여서 속절없이 낙엽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리저리 바람에 쓸리며 흩어지는 낙엽요.

 

'아아 저녁 해를 / 안고 누운 / 긴 강물이나 되고 지고

보고 싶은 너 / 이 마음이 저물어 / 밤하늘 되네'

 

'되고 지고'에서 '지고'는 앞말이 나타내는 동작을 소망하는 말입니다. '되고 싶다'의 뜻이네요.

 

'보고 싶은 너'는 나를 버려두고 멀리 서쪽으로 넘어가는 '저녁 해'인 것만 같습니다. 

 

'긴 강물'이 되어서라도 '저녁 해' 같은 그리운 이를 안고 싶습니다.

 

'긴 강물'이 되어서라도 멀리 있는 그리운 이에게 닿고 싶습니다.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을 깜깜하게 닫아버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내가 깜깜한 밤하늘이 된다면 그대는 빛나는 별로 떠서 나를 찾아오겠지요?

 

시 '가을 햇볕에'를 읽고 나니 밖으로 나가고 싶습니다.

 

따사로운 가을 햇볕에 설익은 마음을 내놓고 익히고 싶습니다.

 

이 따사로운 가을 햇볕에 그리움도 쓸쓸함도 다 말려 부디 그대 마음도 고슬고슬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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