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목구(木具)'를 읽습니다. 명절이나 기일 때 제사상에 올라가는 크고 작은 나무그릇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목구(木具)' 읽기
목구(木具)
백석(1912~1996, 평북 정주)
오대(五代)나 날인다는 크나큰 집 다 찌글어진 들지고방 어득시근한 구석에서 쌀독과 말쿠지와 숫돌과 신뚝과 그리고 녯적과 또 열두 데석님과 친하니 살으면서
한해에 멪번 매연지난 먼 조상들의 최방등 제사에는 컴컴한 고방 구석을 나와서 대멀머리에 외얏맹건을 질으터 맨 늙은 제관의손에 정갈히 몸을 씻고 교우 웋에 모신 신주 앞에 환한 초불밑에 피나무 소담한 제상위에 떡 보탕 시케 산적 나물지짐 반봉 과일들을 공손하니 받들고 먼 후손들의 공경스러운 절과 잔을 굽어보고 또 애끓는 통곡과 축을 귀에하고 그리고 합문뒤에는 흠향오는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것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것과 없는것과 한줌흙과 한점살과 먼 녯 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륵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것
내손자의손자와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 수원(水原) 백씨(白氏) 정주(定州) 백촌(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많은 호랑이 같은 곰같은 소같은 피의 비같은 밤같은 달같은 슬픔을 담는것 아 슬픔을 담는것
▷「정본 백석 시집」(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2019년 32쇄) 중에서.
2. 목구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이 빚어낸 세계
백석 시인님의 시 '목구(木具)'는 1940년 2월 「문장」 14호에 실린 시입니다.
'목구(木具)'는 큰 잔치상이나 제상(祭床)에 음식을 괴어 담는 목기(木器)를 말합니다(「평북방언사전」, 김이협 편저). 그릇의 굽이 높고 둥글며 운두(그릇의 둘레나 높이)가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 시에서는 제사상에 올라가는 나무그릇을 말하네요.
'오대(五代)나 날인다는 크나큰 집 다 찌글어진 들지고방 어득시근한 구석에서'
1연에서 중심단어는 '고방(庫房)'이네요. 고방은 집안 살림에 쓰이는 온갖 물건을 넣어두는 광입니다. 목구가 큰 잔치상이나 제상에 쓰이는 만큼 평소에는 이 고방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고방을 '들지고방'이라고 했는데, 들쥐('들지')가 드나들 정도로 오래되고 낡은 고방이라는 말일까요? 이 고방은 '다 찌글어진' 곳이고, 나를 기준으로 위로 5대, 즉 고조 → 증조 → 할아버지 → 아버지 →나까지 5대나 내려왔다는('오대나 날인다는') '크나큰 집'의 고방입니다.
이 예사롭지 않은 고방에 '목구'는 어떻게 있을까요?
'쌀독과 말쿠지와 숫돌과 신뚝과 그리고 녯적과 또 열두 데석님과 친하니 살으면서'
산다(!)고 합니다.
목구가 보관되어 있는 것을 산다고 한 표현을 만나면서 우리 정신의 어두운 골짜기에 불이 환하게 들어오네요. 목구가 고방 '어득시근한(어두침침한) 구석에서' 살고있다고? 하면서요.
살고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누구누구와 친하게 살고있다고 합니다. '목구'는 누구와 친할까요?
'쌀독과 말쿠지와 숫돌과 신뚝과 그리고 녯적과 또 열두 데석님과 친하니 살으면서'
이 구절이 이 시를 높은 곳으로 올려주는 극적인 대목입니다.
'말쿠지'는 '벽에 옷 같은 것을 걸기 위해 박아 놓은 큰 못'(「평북방언사전」)을, '신뚝'은 '짚신 열 켤레를 새끼줄에 꿰어서 매달아 놓은 것'(김수업)을 말합니다.
'목구'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이가 이렇게 눈에 보이는 세간살이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도 친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녯적)'과 '열두 제석님(데석님)' 말입니다. 제석은 그 집 식구들의 수명이나 곡물, 의류 및 화복을 관장하는 신을 말합니다.
이 구절을 읽으니 이 시가 떠오르네요.
나의 식당에는 빛바랜 그릇장이 하나 있지요
그는 나의 고모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고
나의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지요
이 장은 이 추억들을 잊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요.
만일 사람들이 이 장이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하면 잘못이지요.
나는 이 장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니까요.
▷ 프랜시스 잠 '식당' 중에서.
'묵묵부답이라고만 생각'했던 사물에 대한 시인들의 이런 놀라운 상상력 덕분에 우리는 정말 옴짝달싹 못하게 생겼네요!
3. '슬픔을 담는 것, 아, 슬픔을 담는 것'
'한해에 멪번 매연지난 먼 조상들의 최방등 제사에는 컴컴한 고방 구석을 나와서 대멀머리에 외얏맹건을 질으터 맨 늙은 제관의손에 정갈히 몸을 씻고'
이 2연에서 '목구'는 한 해에 몇 번('멪번') 먼 조상들의 제사 때 고방에서 나와 제상에 올라갑니다. '정갈히 몸을 씻고'요.
누가 '목구'를 씻겨준다고 했을까요?
'대머리(대멀머리)에 외얏맹건을 질으터 맨 늙은 제관'이라고 하네요. '맹건'(맹근)은 망건(網巾)을 말합니다. 상투를 튼 사람이 머리카락을 걷어올려 흘러내리지 않도록 머리에 두르는 그물처럼 생긴 물건입니다.
그런데 그 '맹건'을 대머리에 맸다고 하네요. 그것도 단단히 눌러 '질으터' 맸다고 합니다. 시인님도 이 대목을 쓰면서 쿡 하고 웃었을 것만 같네요.
'목구'는 '정갈히 몸을 씻고' '피나무'로 된 '소담한 제상' 위에 올라간다고 합니다.
자, 이제 시인님이 묘사한 제상 위를 살펴 볼까요?
'교우 웋에 모신 신주 앞에 환한 초불밑에 피나무 소담한 제상위에 떡 보탕 시케 산적 나물지짐 반봉 과일들을 공손하니 받들고 먼 후손들의 공경스러운 절과 잔을 굽어보고 또 애끓는 통곡과 축을 귀에하고 그리고 합문뒤에는 흠향오는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것'
교의('교우')는 제사 때 신주(神主)를 모시는 다리가 긴 의자를 말합니다. 그 '신주 앞에 환한 촛불('초불') 밑에' 크고 작은 목구들이 놓여 있네요.
'목구'의 첫번째 미션은 제사 음식을 담고 있는 것, 그것도 '공손하니 받들고' 있는 일입니다. 떡, 보탕('탕국'), 엿기름 가루를 우린 물을 되직한 이밥이나 찰밥에 부어서 삭힌 식혜('시케'), 산적, 나물로 만든 부침개('나물지짐'), 반봉, 과일들을 말입니다.
여기서 '반봉'은 '제물로 쓰이는 생선 종류의 통칭'(이동순)으로 새깁니다.
'목구'의 임무는 음식 담는 일에 그치지 않네요.
'먼 후손들의 공경스러운 절과 잔을 굽어' 보는 일, '애끓는 통곡과 축을 귀에'하는 일, '합문 뒤에는 흠향 오는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 일이 모두 '목구'가 수행하는 임무라네요. 이 얼마나 지극한 임무인지!
합문(闔門)이란, 제사 절차의 하나로 제관 이하 전원이 밖으로 나오고 문을 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 시간이 바로 조상들이 제물을 받아먹는 '흠향'의 시간입니다. 그 '구신들과 호호히 접하는 것'이 '목구'의 임무라고 합니다. '호호히 접하는 것'이라는 구절에서는 매번 제사 때마다 만나는 '목구'와 '구신'의 반가운 표정이 보이는 것도 같고요.
이렇게 '목구'는 '먼 조상'과 '먼 후손'의 마음을 이어주는 따뜻한 메신저였네요.
'구신과 사람과 넋과 목숨과 있는것과 없는것과 한줌흙과 한점살과 먼 녯 조상과 먼 훗자손의 거륵한 아득한 슬픔을 담는것'
'구신과 사람', '넋과 목숨', '있는 것과 없는 것', '한줌 흙과 한점 살', '녯 조상과 먼 훗자손'은 모두 하나의 말일 것입니다.
하나의 말을 변주하면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면모들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그 깊고 무겁고 아득한 시간들을 생각하게 되네요.
그리하여 우리는 그런 깊고 무겁고 아득한 시간의 끝에서 '거륵한(거룩한) 아득한 슬픔'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런 종류의 슬픔은 우리를 경건하게 합니다.
자비(慈悲)라는 말 속에도 슬픔이 있듯이 삶의 힘은 슬픔일까요?
'거륵한 아득한 슬픔'이라는 구절에서, 후손들을 보호하고 보살펴 주려는 조상들의 애틋한 마음, 그런 조상들을 우러르고 가족의 화평을 간구하는 후손들의 간절한 마음의 여린 결들이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내손자의손자와 손자와 나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와 ··· 수원(水原) 백씨(白氏) 정주(定州) 백촌(白村)의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많은 호랑이 같은 곰같은 소같은 피의 비같은 밤같은 달같은 슬픔을 담는것 아 슬픔을 담는것'
'수원(水原) 백씨(白氏) 정주(定州) 백촌(白村)'이라는 구절이 눈길을 당깁니다. 바로 백석 시인님의 자신의 뿌리를 당당히 밝혀두었네요.
시인님의 가계는 '힘세고 꿋꿋하나 어질고 정 많은' 핏줄이라고 합니다. 그 피의 기질이 '호랑이'나 '곰'이나 '소' 같다고 하네요.
호랑이나 곰이나 소는 우리 민족의 상징 같은 존재이므로 이런 피의 기질은 우리 민족의 기질이기도 할 것입니다.
맨 마지막 구절에서 '목구'의 궁극적 미션이 등장합니다.
'목구'는 '호랑이 같은, 곰 같은, 소 같은 피의' 슬픔을 담는 것이라고 하네요.
또한 '목구'는 '비 같은, 밤 같은, 달 같은' 슬픔을 담는 것이라고 하고요.
왜 시인님은 이렇게 '슬픔을 담는 것'이라는 구절을 세 번이나 반복하는 것일까요?
높은 시름이 있고 슬픔이 있는 혼은 복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시름차지 아니하겠습니까?
시인은 슬픈 사람입니다.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입니다.
▷박팔양 시인의 시집 「여수시초」에 대한 백석 시인의 독후감 중에서
시인님의 위 문장에서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이 가슴으로 들어옵니다.
그런 마음이라면 어떻게 슬프고 시름차지 않겠느냐고 하네요.
시인님은 그런 '거룩한 아득한 슬픔'의 시간에 제사상에 올라가는 '목구'를 명상하고 있습니다.
'목구'는 먼저 간 사람들과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메신저라고 합니다.
그 '목구'를 통해 끊임없는 릴레이처럼 이어지고 있는 삶의 속성과 본질을 떠올리고 있었네요.
'진실로 삶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으로 말입니다.
얼마나 깊고 높고 정다운 마음인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백석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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