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시인님의 시 '추일서정(秋日抒情)'을 만납니다. 황량한 가을날의 애수(哀愁)를 견디고 있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광균 시 '추일서정(秋日抒情)' 읽기
추일서정(秋日抒情)
김광균(1914~1993년, 경기도 개성)
낙엽(落葉)은 포-란드 망명정부(亡命政府)의 지폐(紙幣)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시(市)의 가을하날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푸러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러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急行車)가 들을 달린다
포프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工場)의 집웅은 힌 니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닭 꾸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브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래 발길로 차며
호을노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우러진 풍경(風景)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여 간다
▷김광균 시집 「기항지(寄港地)」(1947년 정음사 발행본을 문학사상사가 '한국현대시 원본전집' 17권에 묶음) 중에서.
김광균 시인님(1914~1993년, 경기도 개성)은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설야'가 당선되면서 등단했습니다.
모더니즘 시론을 실행한 대표적 시인으로 회화성이 짙고 도시의 소시민층의 마음을 따뜻한 서정으로 감싸주는 시를 많이 발표했습니다.
1939년에 첫 시집 「와사등」을 발간한 것을 비롯 「기항지」, 「황혼가」, 「추풍귀우」, 「임진화」 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제2회 정지용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추일서정'은 이미지즘 시의 대표 시
시 '추일서정(秋日抒情)'은 1947년에 나온 김광균 시인님의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제목 '추일서정(秋日抒情)'은 가을날에 느끼는 감정이나 정서를 뜻합니다.
이 시의 가장 큰 특징은 무얼까요?
시인님이 느낀 가을날의 서정이 독특한 그림 속에 녹아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한국 모더니즘과 이미지즘 계열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이미지즘은 시에서 이미지(심상)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입니다.
1947년 나온 시집에 시가 실렸을 때의 원문 그대로를 감상해 봅니다.
'낙엽(落葉)은 포-란드 망명정부(亡命政府)의 지폐(紙幣)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 도룬시(市)의 가을하날을 생각케 한다'
이 시가 처음 발표된 때는 1940년(「인문평론」 7월호)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년)이 발발해 1년쯤 경과된 시간이네요.
이 세계대전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며 독일과 구 소련의 전쟁,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된 전쟁입니다.
'낙엽은 포-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낙엽'과 '지폐'를 동격으로 놓은, 이 낯설고 독창적인 비유는 우리를 시에 강력하게 몰입하게 하네요.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침공을 받은 폴란드 망명정부가 영국에 있었습니다.
가을날 하염없이 떨어지는 낙엽과 그 망명정부의 가치가 떨어진 지폐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가을날의 공허함과 쓸쓸함, 어수선함이 증폭되는 것만 같습니다.
'포화에 이즈러진 / 도룬시의 가을하날을 생각케 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폴란드의 도룬시(토룬시)는 얼마나 황량하고 쓸쓸하겠는지요?
황량하고 쓸쓸한 '낙엽'을 보니 황량하고 쓸쓸한 폐허의 도시 도룬시의 가을 하늘이 생각난다고 하네요.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푸러져 /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러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차(急行車)가 들을 달린다'
매우 한가하고도 적막한, 그래서 더욱 황량한 가을 풍경화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푸러져'. 꼬불꼬불한 한 줄기 들길이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푸러져') 있다는 표현도 매우 선명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건네주네요.
그런 '구겨진 넥타이' 같은 한 줄기 길이 '일광의 폭로 속으로 사라지고('사러지고')'라는 표현에서도 그 풍경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고요.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시인님은 어디 높은 곳에서 가을의 오후에 펼쳐진 먼 들판의 풍경을 주시하고 있네요. 문명의 이기인 급행차는 이곳에 황량함을 잔뜩 부려놓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것만 같습니다.
따갑고 환한 가을햇살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오후 2시의 대낮, 아무도 없어 더욱 적막한 풍경 속을 홀로 걷고 있는 시인님의 고독이 우리에게로 옮겨오고 있네요.
3. 가을의 황량함 속에 방황하는 현대인
'포프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 공장(工場)의 집웅은 힌 니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닭 꾸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브끼고 / 그 우에 세로팡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여기부터 가을의 황량함은 더욱 배가되고 있습니다.
거리의 포플라나무('포프라나무')는 잎이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았네요.
그 사이로 공장이 지붕('집웅')을 흰 이빨('힌 니빨')처럼 드러내고 있다고 하고요.
'흰 이빨'과 '꾸부러진 철책'에서 어떤 위협이 느껴지네요. 급속한 산업화로부터 인간이 소외되는 대목으로 다가옵니다.
'그 위에('우에') 셀로판지('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셀로판지는 공작용으로 쓰이는 여러 가지 색깔의 종이를 말합니다.
가을 하늘을 쳐다보니 거기 떠 있는 구름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셀로판지로 만들어 붙여놓은 것처럼 이질적이고 인위적인 사물로 다가옵니다.
근대화를 지나 현대화가 진행되던 1940년대, 자연마저도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 채 점점 문명화되어 가는 시간이네요.
그 황량함 속을 시인님이 홀로 걸어가고 있네요.
그것도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황량한 가을날 말입니다.
'자욱-한 풀버레 소래 발길로 차며 / 호을노 황량(荒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 기우러진 풍경(風景)의 장막(帳幕) 저 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여 간다'
이 가을날, 외로움을 달래려고 시인님은 이리저리 방황하고 있나 봅니다.
'자욱한 풀벌레('풀버레') 소리('소래') 발길로 차며'. 풀숲을 발로 차서 그 속에서 울던 풀벌레들이 울음을 뚝 그치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네요.
'호올로('호을노')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돌 하나를 던졌다고 합니다.
세계는 섬뜩한 전쟁 속으로 빠져들고 있고, 현대기계문명의 급속한 발달로 평화롭던 삶에 큰 변혁이 다가왔습니다.
그 시간의 황량함을 향하여 돌 하나를 던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돌은 '기울어진('기우러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라고 하네요.
그 돌처럼 시인님도 이 황량한 시간과 공간을 벗어날 수 없다는 우울함이 느껴지네요.
2024년 이 가을에도 세계 도처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도 시시각각 앞서 달려가는 지식정보화로 사람들은 소외되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도 거짓과 탐욕 속에 진실과 순수는 덮여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 '추일서정'은 80년 전의 시이지만 엊그제 탈고된 시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네요.
의지할 곳 없는 황량하고 허탈한 심정이 가을의 애수를 타고 더 짙어지는 시간입니다.
이 가을을 건너고 나면 좀 나아지겠지요?
쓸쓸함을 벗고 우리 좀 따뜻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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