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노루'를 만납니다. 참으로 슬픈 시이지만, 우리는 가끔 이 슬픔의 욕조에 마음을 담가 흔들어야겠습니다. 시인님이 건네주신 풍경 속으로 들어가 함께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노루' 읽기
노루
- 함주시초(咸州詩抄) 2
- 백석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 데다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산골사람은 막베등거리 막베잠방둥에를 입고
노루새끼를 닮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 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산골사람을 닮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약자에 쓴다는 흥정 소리를 듣는 듯이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
- 정본 백석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 중에서
백석 시인님(본명 백기행, 1912~1996)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1930년 19세 때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했습니다. 19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습니다.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출간했습니다. 조선일보 편집기자,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등을 지냈습니다. 1940년부터 만주에서 지내다 1945년 신의주를 거쳐 고향 정주로 돌아와 조만식의 부탁으로 평양에서 러시아어 통역비서로 활동했습니다. 그 후 러시아 문학 번역작업에 몰두해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 1, 2」 등을 냈고,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 등을 냈습니다. 1959년 48세 때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에 내려가 농업협동조합 축산반에서 양치는 일을 맡았으며, 1996년 1월 85세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 순박하고 선량하고 여린 두 주인공
시 '노루'는 1937년 10월 「조광」에 발표됐습니다. 그러니 시 속의 계절은 가을이었을까요? 함경남도 북서쪽 산골마을의 장거리에서 벌어진 풍경이네요.
장진(長津) 땅이 지붕 넘에 넘석하는 거리다 / 자구나무 같은 것도 있다
기장감주에 기장차떡이 흔한데다 / 이 거리에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다리고 왔다
- 백석 시 '노루-함주시초2' 중에서
시의 무대를 보여줍니다. 시골 장터입니다. 장진 땅이 가까운 곳이라고 하네요. 장진은 함경남도 북서쪽 산골마을로 개마고원에 속하는 고장입니다. 자귀나무도 있고요, 오곡밥에 찹쌀, 수수, 콩, 팥과 함께 들어가는 잡곡 기장이 흔한 고장이네요. 그래서 기장으로 만든 단술과 찰떡이 맛있을 것만 같은 마을입니다. 그런데요, 이런 무대 위로 산골사람이 쓱 등장합니다. 노루새끼를 데리고요.
산골사람은 막베등거리 막베잠방둥에를 입고 / 노루새끼를 닮었다
- 백석 시 '노루-함주시초2' 중에서
무대 위에 등장한 산골사람, 우리의 눈길은 모두 그의 옷차림으로 향합니다. '막베'는 거친 베라는 뜻이니 가난한 산골사람이네요. 그런 옷감으로 조끼를 해 입었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홑바지를 해 입었네요.
시인님은 이 산골사람이 노루새끼와 닮았다고 하네요. 둘 다 순박하고 선량하고 여려서 가까이 가서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 듭니다.
노루새끼 등을 쓸며 / 터 앞에 당콩순을 다 먹었다 하고 / 서른닷냥 값을 부른다
- 백석 시 '노루-함주시초2' 중에서
맙소사, 이 가여운 새끼 노루를 팔러 왔군요! 자기가 키우던 노루 새끼 등을 쓸고 있는 산골사람을 좀 보셔요. 죄 지은 듯이 노루에게도, 우리에게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노루 등만 보네요. 강낭콩의 여린 순을 다 먹였다고 합니다. 새끼 노루에게 마지막으로 맛있는 거 먹였네요, 헤어지면서 귀한 거 먹였네요.
"터 앞에 당콩순을 이 아가가 다 먹었어요. 서른 닷냥···"
3. 새끼 노루의 슬픔, 그리고 산골사람의 슬픔이
노루새끼는 다문다문 흰 점이 백이고 배 안의 털을 너슬너슬 벗고 / 산골사람을 닮었다
- 백석 시 '노루-함주시초2' 중에서
앞에서 이미 산골사람이 노루새끼를 닮았다고 했으니 둘이 닮았다는 진술은 그것으로 됐을 텐데, 이젠 노루새끼가 산골사람을 닮았다고 하네요. 시인님은 우리를 슬픔의 궁지로 몰아가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는 듯합니다.
산골사람의 손을 핥으며 / 약자에 쓴다는 흥정 소리를 듣는 듯이 / 새까만 눈에 하이얀 것이 가랑가랑한다
- 백석 시 '노루-함주시초2' 중에서
산골사람은 여전히 손을 노루에게 주고 있네요. 아까 노루 등을 쓸던 그 손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로요. 이 노루를 사려고 하는 사람이 말했겠네요. 허약한 사람의 약으로 쓸 거라고요. 그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새끼 노루 눈물이 그렁그렁 떨어지려 합니다. 이를 어찌해야 할까요?
새끼 노루의 슬픔과 산골사람의 슬픔이 부딪히면서 증폭해 온 마음을 엄습하네요. 백석 시인님은 슬프다는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 말입니다. 백석 시인님! 이토록 애연한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던져놓고 무대 뒤로 사라지면 우린 어떡하나요?
시 '노루', 참 슬픈데요, 읽고 나니 마음이 아린데, 마음이 아려서 마음 밑바닥에 있던 맑고 차가운 물이 퐁퐁 올라오는 것만 같네요. 한 번도 보지 못한 노루의 슬픈 눈망울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 산골사람의 짙은 눈썹과 깊은 눈이 보이는 것만 같네요. 둘 다 안아주고 싶네요. 꼬옥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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