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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장석주 시 대추 한 알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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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님의 시 '대추 한 알'을 만납니다. 이 시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비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시인님이 퍼올려주는 사유의 우물물로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장석주 시 '대추 한 알' 읽기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장석주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애지, 2005) 중에서


장석주 시인님은 1955년 충남 논산 출신으로 1975년 20세 때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 '심야'가,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첫 시집 「햇빛사냥」(1979)을 비롯 시집으로 「완전주의자의 꿈」 「그리운 나라」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 「어떤 길에 관한 기억」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 「크고 헐렁한 바지」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 「붉디 붉은 호랑이」 「절벽」 「몽해항로」 「오랫동안」 「일요일과 나쁜 날씨」 등, 산문집 「언어의 마을을 찾아서」 등, 평론집 「한 완전주의자의 책 읽기」 등이 있습니다. 애지문학상(비평부문), 해양문학상, 월간문학 신인상, 질마재문학상, 영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그대, 지금 열심히 익는 중이지요?


'대추 한 알'은 2005년에 나온 시집 「붉디 붉은 호랑이」에 실린 것으로 보아 시인님이 50세 가까운 즈음에 쓴 시로 보입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태풍 몇 개 / 저 안에 천둥 몇 개 / 저 안에 벼락 몇 개

- 장석주 시 '대추 한 알' 중에서


대추 한 알 속에 참 많은 것이 들었네요. 저렇게 어마어마한 것이 대추 한 알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네요. 범상한 눈으로는 그런 것들이 보일 리 없으니까요. 누가 대추 한 알을 먹으면서 와! 여기에 태풍이, 천둥이, 벼락이 들었네 하겠는지요? 시인님이 이렇게 콕 찍어주시니, 맞아요, 그렇네요, 그렇겠네요, 이렇게 깨우치게 됩니다. 시인님, 고맙습니다!

시인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그대는 어떤 태풍에 맞서 버티고 있는지요?
지금 그대는 어떤 천둥을 안고 불안해하고 있는지요?
지금 그대는 어떤 벼락을 떠받치고 있는지요?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장석주 시 '대추 한 알' 중에서


시인님은 또 이렇게 우리를 위무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대 지금 무서리에 얼마나 추운지요?
그대 지금 찌는 듯 땡볕에 힘드시지요?
그대 지금 얼마나 깜깜하고 외롭겠는지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낱 ···

시인님은 대추 한 알이 이런 수많은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고 통과하여 붉어지고 둥글어진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대추나무에 달린 공중의 대추 한 알, 열심히 익어가고 있겠지요? 그대도, 또 빗방울이네도요.

 

장석주시대추한알중에서
장석주 시 '대추 한 알' 중에서.

 


3. 대추 한 알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시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시 '대추 한 알'을 읽고 나니 빗방울이네는 문득 존재에 대한 생각이 고개를 드네요. 대추 한 알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십시다.

어쩌면 시인님은 '대추 한 알'이라는 시를 통해 대추 한 알의 정의를 내려놓은 것 같습니다. 대추 한 알이란 이런 것이다,라고요. 그대는 대추 한 알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려는지요? 대추 한 알이란 이러이러한 것이다,라고 시인님과 다른 정의를 내릴 수 있겠는지요? 

우리는 아무리 궁리해도 대추 한 알의 정의를 내릴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이를테면 대추 한 알이란 약간 새콤달콤하고 사각거리는 식감의 물기 있는 속살이 있고 그것을 매끈하고 얇은 껍질이 둘러싸고 있는 열매다,라고 정의한다고 칩시다. 그러나 이런 류의 정의는 대추 한 알 말고도 다른 열매에도 해당될 수 있고, 덜 익은 대추 한 알은 새콤달콤하지 않습니다. 이런 많은 이유로 인해 우리는 대추 한 알을 정확하게 지칭할 수 있는 정의라는 것을 완벽하게 내릴 수 없다는 절망에 직면하고 말 것만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대추 한 알에는 대추 한 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추 한 알이라는 물체의 고유한 특성을 나타내는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 대체 대추 한 알은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요?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무서리 내리는 몇 밤,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낱 ···
 
이렇게 대추 한 알이 태풍과 천둥과 벼락, 무서리와 땡볕과 초승달, 빗물과 바람과 토양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지요? 이런 것들은 '우리가 아는 대추 한 알'이 아닌 '외부의 것'입니다. 이런 외부의 것이 대추 한 알을 이루고 있었네요. 
 
이렇게 대추 한 알은 '대추 한 알 이외의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이런 이외의 것, 외부의 것이 없으면 대추 한 알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대는 어떤가요? 그대는 오롯이 그대의 본성으로 개별적으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가요?
 
대추 한 알처럼 그대를 이루고 있는 것은 외부의 것이 아닐까요? 그대를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 그대의 고양이와 책들, 그대의 음악과 음식들, 그대의 일들,그대의 감정을 좌우하는 움직임들···. 이런 외부의 것들이 모여 그대가 되므로, 이런 외부의 것들이 없다면 그대도 없는 것이네요.
 
이렇게 대추 한 알과 세계는 따로 떨어진 둘이 아니라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네요. 이렇게 대추 한 알과 세계를 구별할 만한 게 없으므로 대추 한 알 또는 그대라고 할만한 게 없네요. '나'만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 아닌 것', 즉 나의 외부를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 있었네요. 그래야 '나'가 행복해지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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