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시인님의 시 '엄마 걱정'을 만납니다. 우리를 아주 먼 옛날로 데려다주는 시입니다. 시인님의 손을 잡고 저마다의 먼 옛날로 가서 마음속의 아이를 만나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기형도 시 '엄마 걱정' 읽기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년) 중에서
기형도 시인님(1960~ 1989)은 경기도 옹진군 연평 출신으로 1983년 연세대 대학신문 '연세춘추' 주관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 정치부 문화부 편집부 등의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심야 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사인은 뇌졸중.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 된 「입 속의 검은 잎」(1989년)이 있고, 1주기를 맞아 산문집 「짧은 여행의 기록」이, 5주기 때 미발표작과 문단의 동료·선후배의 추모 작품을 담은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가 발간됐습니다.
2. '찬밥처럼 방에 담겨' 있었던 적이 있나요?
기형도 시인님의 시 '엄마 걱정'은 그의 사후에 발간된 첫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의 맨 마지막 페이지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시집에 실린 시의 순서는, 시집 발간 준비를 하다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시인님이 생전에 그려놓은 시의 배열도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시 '엄마 걱정'의 배치는 눈길을 끕니다.
우리는 이 쓸쓸함으로 가득한 시집을 읽다가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 빈방에 찬밥처럼 담겨 울고 있는 한 아이와 조우하게 되었네요. '지금까지 시집 속의 이야기들이 이 외로운 아이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라고 시인님이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 아이를 만나 볼까요?
시인님의 약력을 보니(「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1969년 시인님 10세 때 부친이 중풍으로 쓰러집니다. 그래서 얼마 없던 전답조차 약값으로 남의 손에 넘어가고 모친이 생계 일선에 나서게 됐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 시장에 간 우리 엄마 /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 기형도 시 '엄마 걱정' 중에서
여름날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된 엄마가, 채소를 팔러 시장에 간 엄마가 늦도록 오지 않고 있네요. '해는 시든 지 오래'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문득 아이의 마음이 되어 엄마의 팔리지 않은 열무가 시들었을 거라는 걱정마저 일어나네요. 엄마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는지 하는 걱정과 함께요.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 기형도 시 '엄마 걱정' 중에서
이 두 구절이 이 시의 솟대인 것 같습니다. 나는 찬밥이고, 그 찬밥처럼 방에 담겨있다고 하네요. 이 구절은 같은 시집에 실린 다음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보시죠.
둑방에는 패랭이 꽃이 무수히 피어 있었다. 모두 다 꽃씨들을 갖고 있다니. 작은 씨앗들은 어떻게 큰 꽃이 될까. 나는 풀밭에 꽂혀서 잠을 잤다.
- 기형도 시 '위험한 가계·1969' 중에서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와 '나는 풀밭에 꽂혀서'는 같은 느낌의 다른 표현인데, 둘 다 나를 '인형'처럼 보고 있네요. 내가 방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담겨 있고, 내가 풀밭에 있는 것이 아니라 꽂혀 있는 피동의 상태입니다. 나는 나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놓여 있음을 강조하고 있네요. 얼마나 막막하고 외로운지요?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는 참 절묘한 구절입니다. 금방 끝낼 수 있는 숙제를 일부러 아주 천천히 하고 있다는 진술로 인해 엄마를 기다리는 이 아이의 외로움이 생생하게 옮겨오네요.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 기형도 시 '엄마 걱정' 중에서
하루종일 시장에서 열무를 팔다 지친 엄마의 발소리를 시들어버린 배춧잎에 겹쳐 우리를 더 애연하게 합니다.
'엄마 안 오시네'라는 구절이 두 번째로 등장합니다. 과거의 이야기이지만 엄마가 안 오시는 상황이, '엄마'라는 따뜻한 둥지의 부재가 성인이 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기형도 시 '엄마 걱정' 중에서
이제 성년이 된 화자는 '아주 먼 옛날'의 '내 유년의 윗목'을 회상하고 있지만, 사실은 지금도 그 아이가 기억 속의 방에 찬밥처럼 담겨 울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고 했으니까요.
그러니 제목 '엄마 걱정'과는 달리 시의 화자는 엄마로부터 단절된 자신의 '마음속의 아이'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밤늦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는 엄마를 기다리던 그 아이는 이제 성인이 되었지만 이 세계 속에 고립되어 여전히 울고 있네요.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지요?
3. 그대 '마음속의 상처 입은 아이'를 만났나요?
기형도 시인님의 시 '엄마 생각'을 읽으면서 문득 '마음속의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빗방울이네는 이무석 교수님의 「나를 사랑하게 하는 자존감」이라는 책을 이 '독서목욕'에 포스팅한 적이 있습니다. 교수님은 이 책에서 '마음속의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삶을 지배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이 때 느꼈던 열등감이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져 자존감이 낮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마음속의 아이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야 자신에 대한 부정적 관점을 바꿀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때 '독서목욕'에 올린 글을 본 블로그 이웃님이 댓글을 달아주셨는데, 이 분은 배고픔에 대한 두려움이 따라다닌다고 했습니다. 결혼해서 아내와 아이들을 굶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도 시달리곤 했다 합니다. 이 이웃님이 이무석 교수님 관련 글을 읽고 나서 돌아보니, 어린 시절 배고팠던 기억이 시간의 지층에 남아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네 삶은 단절된 시간의 총합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동시에 같은 판 위에서 펼쳐지고 있는 현상인 것만 같습니다.
아, 그는 어린애였다! 그는 그가 통과한 궁핍과 끔찍한 불행의 유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닫힌 세계를 살다 간 것이다.
-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솔출판사, 1994)에 실린 '기형도, 삶의 공간과 추억에 대한 경멸'(성석제 시인) 중에서
성석제 시인님이 생전 친했던 기형도 시인님을 추모하며 쓴 문장입니다. 안타깝게도 29세에 요절한 기형도 시인님은 그때까지 '어린애'였다고 하네요! 이렇게 그의 ‘외로운 어린애’는 그를 꽉 잡고 따라다니고 있었던가 봅니다.
시 '엄마 걱정'을 읽으며 혹시 그대의 지층 속에서 울고 있는 마음속의 아이가 떠올랐는지요?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시간이 흘러가지 않는다고 말하는 마음속의 외로운 아이를 만났는지요? 그 아이가 그대에게 건네는 간절한 말은 무엇이었는지요? 어떤 사연이라도 이제는 다 괜찮다고 꼭 안아주었는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마음속의 아이' 연관 글을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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