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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박성우 시 참깨 차비

by 빗방울이네 2024.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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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우 시인님의 시 '참깨 차비'를 만나봅니다. 우리의 삶을 살만하게 해주는 고마운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씻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박성우 시 '참깨 차비' 읽기

 

참깨 차비

 

박성우(1971년~ , 전북 정읍)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 문 앞에 어정쩡 앉으신다

처음 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선가 뵌 것 같기도 한,

족히 여든은 넘어 뵈는 얼굴이다

아침잠이 덜 깬 나는, 누구시지? 내가 무얼 잘못했나?

영문도 모른 채 뒷머리만 긁적긁적, 안으로 드시라 했다

 

할머니는 불쑥 발을 꺼내 보여주신다

흉터 들어앉은 복사뼈를 만지신다

그제야 생각난다, 언제였을까

할머니를 인근 면소재지 병원에 태워다 드린 일,

시간버스 놓친 할머니가 동그마니 앉아 있던 정류장,

펄펄 끓는 물솥을 엎질러 된통 데었다던 푸념,

탁구공 같은 물집이 방울방울 잡혀 있던 작은 발, 생각난다

근처 칠보파출소에 들어가 할머니 진료가 끝나면

꼭 좀 모셔다드리라 했던 부탁,

할머니는 한 됫박이나 될 성싶은

참깨 한 봉지를 내 앞으로 민다

까마득 잊은 참깨 차비를 낸다

얼결에 한 됫박 참깨 차비를 받는다

 

지팡이 앞세우고 물어물어,

우리 집을 알아내는 데 족히 일 년이 넘게 걸렸단다

대체 우리는 몇가마니나 되는 참깨를 들쳐메고

누군가의 집을 찾아 나서야 하나?

받은 참깨 한 봉지 들고 파출소로 간다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창비, 2016년 7쇄) 중에서

 

박성우 시인님은 1971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200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거미'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2006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됐습니다. 

시집으로 「거미」 「가뜬한 잠」 「자두나무 정류장」 등, 동시집으로 「불량 꽃게」 「우리 집 한 바퀴」 「삼행시의 달인」 등, 청소년 시집으로 「난 빨강」 「사과가 필요해」 등, 어른을 위한 동화 「컵 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신동엽창작상, 윤동주젊은작가상, 백석문학상, 불꽃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지나치지 않고 행한 어떤 선행 이야기

 

박성우 시인님의 시' 참깨 차비'는 마음이 환해지는 시입니다.

 

시 속에 '칠보파출소'가 나오는 걸 보니, 시의 장소는 전북 정읍입니다. 시인님 고향이네요.

 

아마 이 시속에서 시인님이 살고 있던 집은 칠보파출소에서 많이 떨어진, 차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외진 시골인가 봅니다.

 

그 시골에서 벌어진 이야기네요.

 

'할머니 한 분이 들어와 문 앞에 어정쩡 앉으신다 / 처음 뵈는 것 같기도 어디선가 뵌 것 같기도 한 / 족히 여든은 넘어 뵈는 얼굴이다

아침잠이 덜 깬 나는, 누구시지? 내가 무얼 잘못했나? / 영문도 모른 채 뒷머리만 긁적긁적, 안으로 드시라 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여든이 넘어 보이는 어떤 할머니 한 분이 시인님이 사는 시골집을 불쑥 찾아왔네요.

 

이렇게 갑작스러운 이방인의 방문에 '내가 무얼 잘못했나'라고 생각했다는 시인님의 반응에 눈길이 가네요.

 

이렇게 경계하며 삭막해진 세상이기만 할까요?   

 

'할머니는 불쑥 발을 꺼내 보여주신다 / 흉터 들어앉은 복사뼈를 만지신다

그제야 생각난다, 언제였을까 / 할머니를 인근 면소재지 병원에 태워다 드린 일'

 

할머니가 불쑥 발을 꺼내 보여주는 이 장면, 말이 필요 없는 장면이네요.

 

시인님이 흉터 진 할머니 발을 보자마자 그날의 기억이 주르륵 달려 나왔네요.

 

외진 시골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놓친 할머니를 태워 병원까지 태워드린 일요.

 

그날 할머니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시간버스 놓친 할머니가 동그마니 앉아 있던 정류장 / 펄펄 끓는 물솥을 엎질러 된통 데었다던 푸념

탁구공 같은 물집이 방울방울 잡혀 있던 작은 발, 생각난다

근처 칠보파출소에 들어가 할머니 진료가 끝나면 / 꼭 좀 모셔다 드리라 했던 부탁'

 

끓는 물에 발을 덴 거였네요. 그래서 급히 병원에 가려다가 버스를 놓치고 속수무책 정류장에 앉아있었네요.

 

그런 할머니를 지나치지 않고 병원까지 태워다 드린 시인님은 얼마나 다정하신지요.

 

그뿐이 아닙니다.

 

파출소에 가서 할머니의 처지를 경찰들에게 알려주고 나중에 할머니를 집까지 모셔다 드렸으면 좋겠다고 부탁까지 했다네요.

 

이 구절에서 시인님의 따뜻하고 깊은 마음이 우리에게 건너옵니다.  

 

"까마득-잊은-참깨-차비"-박성우-시-'참깨-차비'-중에서.
"까마득 잊은 참깨 차비" - 박성우 시 '참깨 차비' 중에서.

 

 

3. 밀린 '참깨 차비'를 생각하게 하는 시

 

'할머니는 한 됫박이나 될 성싶은 / 참깨 한 봉지를 내 앞으로 민다

까마득 잊은 참깨 차비를 낸다 / 얼결에 한 됫박 참깨 차비를 받는다'

 

할머니가 이른 아침에 시인님의 집을 찾아온 이유입니다.

 

할머니는 그날의 시인님이 너무 고마워서 '한 됫박 참깨'를 사례로 들고 오셨네요.

 

시의 제목이 된 '참깨 차비'가 여기서 나왔네요.

 

참깨 한 됫박. 참깨의 이미지에서 깨알 같은 정이 느껴집니다.

 

하나하나 셀 수 없는 정 말입니다. 

 

하나 하나 살아 숨 쉬는 따뜻한 정 말입니다.

 

'지팡이 앞세우고 물어물어 / 우리 집을 알아내는 데 족히 일 년이 넘게 걸렸단다

대체 우리는 몇 가마니나 되는 참깨를 들쳐메고 / 누군가의 집을 찾아 나서야 하나?

받은 참깨 한 봉지 들고 파출소로 간다'

 

그런데요, 할머니가 자신을 도와준 시인님을 찾는 데 일 년이 넘게 걸렸다고 하네요.

 

이름도, 전화번호도, 차 번호도 몰랐을 할머니는 '지팡이 앞세우고 물어물어' 시인님이 사는 집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시인님이 할머니를 병원에 태워다 드린 일도 뜨겁지만, 할머니가 일 년 넘게 시인님 집을 찾아 헤맨 일이 더 뜨겁게 다가오네요.

 

이렇게 삶을 살아가자고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은 할머니네요.

 

자신을 병원에 태워준 낯선 사람을 찾기 위해 물어물어 그 사람의 집을 찾아낸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이렇게 기어코 '참깨 차비'를 내야만 했던 것이 할머니의 삶의 길이겠지요? 

 

그렇게 기어이 '참깨 차비'를 낸 일로 인해 우리 삶은 참으로 구체적으로 아름다워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대체 우리는 몇 가마니나 되는 참깨를 들쳐메고 / 누군가의 집을 찾아 나서야 하나?'

 

삶에서 우리 이렇게 '참깨 차비'를 내야 할 일이 얼마나 많겠는지요?

 

홀로 살아가는 듯해도, 내가 잘 나서 내가 잘 살고 있는 듯해도 저마다 얼마나 많은 인연의 어깨에 기대고 살아가는지요?

 

어서 그 사람을 찾아가 '참깨 차비'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요, 이 따뜻한 시인님 좀 보셔요.

 

'받은 참깨 한 봉지 들고 파출소로 간다'

 

할머니로부터 '차비'로 받은 참깨를 자신이 갖지 않고 파출소로 갔네요.

 

아마 그날 진료를 마친 할머니를 집까지 모셔다 드린 파출소 순경들에게 참깨를 건네주려고 그랬겠지요?

 

그날 순경들에게 그 '참깨 차비'가 전해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어떤 사랑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돌고 또 도는 사랑이어서 우리 삶도 둥글게 앞으로 나아가나 봅니다.

 

밀려있는 '참깨 차비'를 곰곰 생각해 보는 저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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