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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현승 시 검은빛

by 빗방울이네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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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승 시인님의 시 '검은빛'을 만납니다. 검은빛 속으로 스며들어 포옥 안기고 싶어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현승 시 '검은빛' 읽기

 
검은빛
 
- 김현승(1913~1975, 평양 출생)
 
노래하지 않고,
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
 
눈을 뜨지 않고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빛.
 
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지 않고
꽃마다 품 안에 받아들이는 
빛.
 
사랑하기보다 
사랑을 간직하며,
허물을 묻지 않고
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
 
모든 빛과 빛들이
반짝이다 지치면,
숨기여 편히 쉬게 하는 빛.
 
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
아픔보다도 더 아픈,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
 

- 「김현승 시전집」(김인섭 엮음/해설, 민음사, 2005년) 중에서

 

 

2.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빛'

 
'플라타너스의 시인' 김현승 시인님의 시 '검은빛'은 1968년 「현대문학」을 통해 발표된 시입니다. 
 
검은빛,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요?
 
밤이 떠오른다고요? 어쩐지 우울하고 혼란스럽고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공포나 절망, 그리고 죽음도 떠오르고요.
 
오늘 만나는 시 '검은빛'은 검은빛에 대한 이런 생각을 씻어주는 시입니다.
 
어떤 시일까요?
 
노래하지 않고, / 노래할 것을 / 더 생각하는 빛
눈을 뜨지 않고 /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 빛

- 김현승 시 '검은 빛' 중에서

 
시인님이 말하는 검은빛의 속성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노래'를 멈추고 내면으로 침잠하여 '노래할 것을 더 생각하는 빛'이라고 합니다. 긴장과 갈등이 파도치는 환한 빛의 시간에서 사유와 성찰의 시간으로 들어가게 하는 '검은빛'입니다.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빛'. 이 구절이 참 좋습니다. 검은빛이 '눈을 고요히 감고 있는 빛'이라는 성찰은 얼마나 깊고 깊은지요. 
 
이 문장을 함께 읽어봅니다.
 
밤이 오면 죄수는 감옥을 잊어버리고 / 밤이 오면 임금은 권세를 잊어버린다.
슬픔도 없고, 득실에 맘을 쓰는 일도 없으며, / 이 사람 저 사람이란 생각조차 없다.
이것은 영지자(gnostic)의 모습, 그가 깼을 때의 모습이다.

- 「바가바드 기타」(함석헌 주석, 한길사, 1996년 1쇄, 2021년 16쇄)에 인용된 '이슬람의 신비가' 중에서

 
검은빛은 나와 사물과의 관계를 끊어서 사물과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긴장과 갈등을 없애줍니다. 눈을 감으면 마음의 눈이라는 또다른 눈이 뜨입니다. 검은빛은 오로지 마음의 눈으로 우리의 내면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빛이네요.
 
꽃들의 이름을 일일이 묻지 않고 / 꽃마다 품 안에 받아들이는 / 빛
사랑하기보다 /사랑을 간직하며, / 허물을 묻지 않고 / 허물을 가리워 주는 / 빛
모든 빛과 빛들이 / 반짝이다 지치면, / 숨기여 편히 쉬게 하는 빛

- 김현승 시 '검은 빛' 중에서

 
이 구절들, 참 따뜻하네요. 검은빛의 편안하고 조용한 품속으로 젖어들고 싶은 구절들입니다.
 
꽃들은 어둠 속에서 저마다의 이름이 지워집니다. 더 이쁘고 덜 이쁨이 없겠습니다. 무엇이든 다 품어주는 검은빛입니다. 원래 차별이 없던 사물들은 빛에 의해 윤곽이 드러나면서 서로 다른 모양으로 인식되고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겠지요.  
 
'허물을 묻지 않고 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 이런 검은빛의 속성은 어머니의 품속 같겠습니다. 어리석음도 부끄러움도 다 품어주는 어머니, 검은빛이네요. 
 
검은빛은 모든 빛들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빛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애써 더 반짝이지 않아도 괜찮아. 품을 내어주며 숨겨주고 쉬게 해주는 검은빛이라고 합니다. 참 따뜻하네요.
 

"허물을가리워주는빛"-김현승시'검은빛'중에서.
"허물을 가리워 주는 빛" - 김현승 시 '검은 빛' 중에서.

 

 

3. '빛에 닿은 단 하나의 빛'

 
「천자문」에 처음 등장하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라는 뜻입니다.
 
하늘이 검다고 하는데, 왜 하늘이 검을까요? 이때 쓰인 검을 '玄(현)'의 뜻은 '검다'도 있지만, '오묘하다', '심오하다', '깊다', '고요하다', '멀다', '아득하다', '짙다', '크다' 등의 뜻도 있습니다. 서로 상관이 없을 것 같은 여러 뜻들이 한 글자(玄) 속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점은 신기하기만 합니다. 검다는 뜻이 그런 뜻들과 서로 같은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천지현황(天地玄黃)' 속에 든 '하늘은 검다'라는 문장에는 단순히 '검다'라는 색의 개념보다 더 특별한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멀고 아득해서 검은 하늘의 이치를 헤아리는 것은 얼마나 멀고 아득한 일인가 하는 심오한 의미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지렛대로 삼아 마지막 구절을 만납니다.
 
그러나 붉음보다도 더 붉고 / 아픔보다도 더 아픈, / 빛에 닿은 / 단 하나의 빛

- 김현승 시 '검은 빛' 중에서

 
'붉음보다 더 붉고 아픔보다 더 아픈'. 너무나 멀고 아득해서 검은빛은 모든 빛을 다 품고 있고, 모든 아픔을 다 가진 아픔이라는 걸까요? 그래서 다른 빛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배후가 되는 어머니 빛, 스스로 사라지면서 빛을 탄생시키는 '단 하나의 빛', 그 빛이 바로 오묘한 검은빛이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현승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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