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님의 시 '라일락꽃' 향기를 맡습니다. 비 오는 길을 걷다 짙은 라일락꽃 향기에 뒤를 돌아보셨나요? 거기 비에 젖고 있던 라일락꽃이 혹시 뭐라 하지 않던가요? 시인님이 건네주는 '라일락꽃' 향기에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도종환 시 '라일락꽃' 읽기
라일락꽃
- 도종환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 도종환 시집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창비) 중에서
도종환 시인님은 1954년 충북 청주 출신으로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 1985년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습니다. 1985년 첫 시집 「고두미 마을에서」를 낸 그는 베스트셀러가 된 「접시꽃 당신」을 비롯, 시집 「당신은 누구십니까」 「슬픔의 뿌리」 「해인으로 가는 길」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등을 발간했습니다. 또 산문집 「사람은 누구나 꽃이다」 등을 , 동화집 「나무야 안녕」 등을 냈습니다. 신동엽창작기금상, 정지용문학상, 윤동주문학대상, 백석문학상,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백만 대군이 와도 뺏지 못할 향기
빗방울이네의 단골 목욕탕 마당에는 봄이면 라일락꽃 향기가 진동합니다. 마당 한 구석에 어른 키보다 큰 라일락꽃나무가 있습니다. 이 라일락꽃 때문에 목욕 가는 일이 즐거운 봄입니다.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 도종환 시 '라일락꽃' 중에서
향기와 빛깔에 대한 이야기네요. 비에 젖은 꽃을 보면 애연함부터 느끼는데요, 시인님은 하루 종일 비에 젖는 라일락꽃을 보면서 비에 젖지 않는 그 향기와 빛깔을 떠올렸네요.
시의 화자는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는 평서문으로 진술하고 있지만 자꾸 읽다 보면 울림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나의 향기를 뺏으려는 힘, 나의 빛깔을 지워버리려 하는 힘에 대해 강하게 저항하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나의 향기와 빛깔은 절대 지우거나 뺏어갈 수 없는 거야! 하고 소리치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서 '비'는 나의 것을 지우거나 뺏으려 드는 나쁜 타자일 것입니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 출렁 허리가 휘는 / 꽃의 오후
- 도종환 시 '라일락꽃' 중에서
그런 비가 진종일 하루종일 내려서 그 빗방울 무게에 짓눌려 허리가 휘어도 향기와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하네요.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 순한 얼굴
- 도종환 시 '라일락꽃' 중에서
이렇게 여리고 창백하고 순한 얼굴이지만, 아무리 거센 비라도 그 향기와 빛깔을 뺏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건 본성이니까요.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처럼 말입니다. 백만 대군이 와도 라일락꽃의 향기와 빛깔을 뺏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강제로 뺏으려하면 갈등과 마찰 그리고 파국이 초래되겠죠. 그러면 저 순한 얼굴의 라일락꽃은 어떻게 될까요?
3. 그대는 어떤 향기와 빛깔인가요?
이 시는 우리에게 또 다른 질문 하나를 던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독특한 존재이다. 자기만의 독특함을 추구하고 찾는 것은 스릴이 넘치는 일이며 커다란 모험이다.
- 「명상,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오쇼 라즈니쉬 강의, 손민규 옮김, 태일출판사) 중에서
빗방울이네는 한 때 이 문장을 작은 일정수첩 맨 앞장에 적어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눈을 맞추곤 했습니다. 읽을 때마다 이 문장은 저를 자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문장 하나가 이렇게 사람에게 커다란 위안을 주는 일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모든 인간이 다 같을 수 없다는 말에 큰 위안을 얻습니다. 모두 다 자기만의 독특함이 있다고 하네요. 자기만의 향기와 빛깔 말입니다. 나에게 그 향기와 빛깔은 무얼까? 나의 향기와 빛깔은 어떻게 발현될까? 이런 생각만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고 행복한 느낌이 드네요.
그런데 두 번째 문장 좀 보셔요. 자기만의 독특함을 추구하고 찾는 일, 그것은 스릴이 넘치는 커다란 모험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것이면서도 자신 안에 어떤 향기와 빛깔이 있는지 모르니까요, 그것은 미지(未知)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 같은 일이라고 하네요. 이는 참으로 굉장한 일이 아니겠는지요?
그 당시 빗방울이네는 무언가를 쫓아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 정해놓은 것에 나를 맞추려 했던 것 같습니다. 나를 잃어버린 채 말입니다. 그런데 작은 일정수첩의 이 문장과 날마다 수없이 마주치면서 그렇게 누군가를 쫓아가고 싶은 생각이 많이 밀려났습니다. 그래 맞아, 나만의 독특함을 추구하자!
라일락꽃이 봄비에 젖는 시간입니다. 라일락꽃은 자신의 성정대로 엷은 보라색으로 활짝 피어나 비에 젖고 있습니다. 지나칠 때마다 라일락꽃은 빤히 쳐다보는 것만 같습니다. 너는 어떤 향기와 빛깔이 있느냐고, 너는 너의 성정대로 활짝 피었느냐고 자꾸 물어보는 것만 같은 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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