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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정지용 시 유리창 1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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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인님의 시 '유리창 1'을 열어봅니다. 이 슬픈 시는 어떻게 우리를 씻겨주고 토닥여주고 재워줄까요? 시인님이 퍼올린 뜨거운 시 물로 마음을 씻으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정지용 시 '유리창 1' 읽기


유리창 1
 
- 정지용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전집·시」(권영민 엮음, 민음사) 중에서

 
우리에게 ‘페이터의 산문’으로 잘 알려진 수필가이자 영문학자인 이양하 교수님(연희전문학교)은 1935년 정지용 시인님(1902~1950)의 첫 시집이 나오자 "온 세계 문단을 향하여 '우리도 마침내 시인을 가졌노라' 하고 부르짖을 수 있을 만한 시인을 갖게 되고, 또 여기 처음 우리는 우리 조선말의 무한한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우리도 마침내 시인을 가졌노라! 참으로 한 시인에게 바치는 최고의 상찬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시의 울음터는 '물 먹은 별'


오늘 함께 읽어볼 정지용 시인님의 시 '유리창 1'은 어떤 시일까요? 이 시는 정지용 시인님이 자신의 시 가운데 가장 아끼는 시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시인님 생전에는 모두 3권의 시집이 나왔는데요, 세 번째 시집(「지용시선」, 1946년)은 첫 번째(「정지용시집」) 두 번째(「백록담」) 시집의 시 중에서 시인이 직접 고른 23편의 시와 2편의 산문이 실렸는데, 이 시집의 맨 앞자리에 실린 시가 바로 '유리창 1'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지용 시인님은 왜 이 시를 그리 애지중지하였을까요? 우리 함께 시 속으로 들어가 그 까닭을 함께 느껴보십시다.

먼저, '유리창 1'의 울음터는 어디일까요? 시에 다가가는 길은 수없이 많겠지요? 빗방울이네는 '물 먹은 별'에 자꾸 눈길이 머무네요. '물 먹은 별'이란 어떤 상황일까요? 자, 처음부터 읽겠습니다.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 정지용 시 '유리창 1' 중에서

 
'차고 슬픈 것'이라는 진술로 보아, 지금 화자의 마음은 차고 슬픈 상태입니다. 정황상 때는 겨울밤인데 길 잃은 새 한 마리가 창밖 가까이 왔나보네요. 추울 텐데요. 입김을 유리창에 붑니다. 바짝 붙어 서서요. 그리니 인기척을 느꼈는지, '차고 슬픈' 새가 언 날개를 파닥거리네요. 길들은 새처럼요.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 정지용 시 '유리창 1' 중에서

 
유리창에 입김을 불고 지우고 창밖을 보고, 또  불고 지우고 창밖을 보는 화자의 행동이 이어집니다. 어둠 속의 새를 보는 걸까요? 이미 새는 날아가버렸을까요? '새까만 밤'은 화자의 암울한 마음인 듯합니다. 새까만 밤이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우듯이 새까만 밤 같은 마음도 그렇게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그런 마음은 얼마나 기가 막힌 마음이겠는지요? 그런 엄청난 마음이 밀려 유리창 밖으로 나가고 다시 밀려와 유리창에 부딪힌다고 합니다. 우리 가슴도 다 미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는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라고 하네요. 가슴이 터질 듯했던 화자는 이 지점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눈물 가득한 눈에 비친 별, 그것이 '물 먹은 별'이겠네요! 울음이라는 표현이 전혀 없는데도 화자의 울음소리, 그 격한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네요.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 정지용 시 '유리창 1' 중에서

 
여기서 '황홀한'이라는 표현은 우리를 휘청거리게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황홀(恍惚)의 의미는 '어떤 사물에 마음이나 시선이 혹하여 달뜸'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이 시 공간은 무척 기괴한 분위기로 다가옵니다. 특히 '정신이 흐리고 사리 판단이 잘 안 되는 상태'라는 황홀의 또 다른 의미를 유추하면서 우리는 화자의 정신이 매우 혼미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정지용 시 '유리창 1' 중에서

 
그랬습니다. '늬'가 폐결핵으로 숨졌다고 합니다. 산새처럼 날아갔다고 하니, 포르르하고, 갑자기 어디론가 방향도 모르게 깊고 깊은 어둠의 허공 속으로 가버린 '늬'를, 실성한 듯 유리를 문지르며 또 문지르며 망연히 쳐다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절망과 애절한 그리움이 느껴집니다. 여기서 이 시의 첫줄에 등장한 ‘차고 슬픈 것’이 ‘뉘’의 환영일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된 우리의 마음은 ‘새까만 밤’이 되고 맙니다. 이를 어찌하는지요.
 

정지용시유리창1중에서
정지용 시 '유리창 1' 중에서

 

 

3. 눈이 멀 정도로 슬픈 일에 대하여

 
정지용 시인님이 28세 때인 1929년 12월 발표한 ‘유리창 1’은 이듬해 1월 「조선지광」 89호의 1쪽에 실렸다고 합니다. 첫 페이지에 말입니다.
 
'유리창'은 여식을 잃고 읊은 것

-  「정지용 연구」(김학동 지음, 민음사) 중에서

 
위 책에 실린 석은 님의 '시인의 법열 - 지용의 예술에 관하여'이라는 제목의 글에 위의 문장이 나옵니다. 이 글은 정지용 시인님의 두 번째 시집이 나온 1941년 즈음 쓰인 것으로, 첫 번째 시집과 두 번째 시집에 대한 평론입니다. 이 글은 정지용 시인님이 시 '유리창 1'을 쓰기 직전 어린 딸을 잃었다는 전언을 뒷받침합니다. 

정지용 시인님은 1913년 12세 때 송재숙 님과 결혼해 3남 1녀의 자녀를 둔 것으로 공식 연보에 나옵니다. 연보에 따르면, 정지용 시인님이 27세 때 장남(구관), 30세 때 차남(구익), 32세 때 삼남(구인), 33세 때 장녀(구원)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유리창 1'이 28세 때 작품이니까, 장남과 차남 사이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딸이 사망한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상명지통(喪明之痛)'이라는 말이 생각나시지요? 아이를 잃고 얼마나 슬피 울었으면 눈이 다 멀게 되었을까요?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창자가 끊어져 죽었다는 '단장지애(斷腸之哀)'라는 말은 또 얼마나 아픈지요?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 새까만 밤이 밀려 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 정지용 시 '유리창 1' 중에서

 
정지용 시인님은 그렇게 '물 먹은 별'이 비친 유리창을 닦고 또 닦고 있습니다. 별처럼 빛나는 아이의 얼굴을 닦고 또 닦고 있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고 합니다. 가슴에 자식을 묻고 눈이 멀 듯한 슬픔, 내장이 끊어질 듯한 아픔을 삼키며 밤마다 아니 매 순간, 별 같은 아이의 얼굴을 닦고 또 닦으며 살아가는 이 땅의 부모님들과 함께 아파하고 슬퍼하는 봄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 목욕'에서 정지용 시인님의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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