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천명 시인님의 시 '사슴'을 만납니다. 시인님의 자화상 같은 시, 시인님이 보내온 슬프고 아름다운 '사슴'을 어루만지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노천명 시 '사슴' 읽기
사슴
- 노천명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언제난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노천명 시집 「사슴」(창작시대) 중에서
노천명 시인님(1911~1957)은 황해도 장연 출신으로 1935년 시전문지 「시원(詩苑)」 창간호에 시('내 청춘의 배는')를 기성문단에 처음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한 시인님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를 비롯 조선일보 출판부 「여성」 편집기자, 매일신문 문화부 기자, 부녀신문사 편집차장, 모교인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일을 맡아 「이화 70년사」 출판에 참여했습니다. 1938년 첫 시집 「산호림」을 발간한 것을 비롯, 「창변」 「별을 쳐다보며」, 유고시집 「사슴의 노래」 등, 산문집 「산딸기」 「나의 생활백서」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2. 고독 속에서 살다 간 시인의 자화상
시 '사슴'으로 '사슴의 시인'으로 불리게 된 노천명 시인님의 삶은 출발부터 고독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1911년 태어난 시인님이 홍역으로 죽음의 고비를 넘겨 살아나자 부모님은 '하늘이 주신 명(天命)으로 살아났다'하여 노기선에서 노천명으로 개명해 1912년 출생으로 호적에 올렸다 합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시킨 남장 차림이 싫어 시인님은 자주 울고 학교에 결석도 많이 했고, 시인님 8세에 아버지가, 또 시인님 20세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시인님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삶을 살았습니다.
조그마한 거리낌에도 밤잠을 못 자고 괴로워하는 성격은 살이 머물지 못하게 학대를 했을 게다
꼭 다문 입은 괴로움을 내뿜기보다 흔히는 혼자 삼켜버리는 서글픈 버릇이 있다
- 노천명 시 '자화상' 중에서
위의 시 구절은 시인님의 성정(性情)을 짐작할 수 있게 하네요. 이처럼 세상 일과 쉽게 섞이지 못하고 고독하고 정한 성품이 시 '사슴'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시 '사슴'은 1938년 첫 시집에 실린 작품이니 시인님 20대 후반 즈음에 쓰인 시입니다. 그래서 이 시는 노천명 시인님의 서시이기도 하겠네요. 자신의 '시의 길'을, '삶의 길'을 선언한 시 말입니다.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 노천명 시 '사슴' 중에서
이 첫 두 줄에서 우리는 순하고 쓸쓸하고, 무언가를 그리워하고 있는 슬픈 사슴의 이미지와 함께 시인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시에서 미화되는 사슴과 화자인 시인님과의 거리를 벌려놓으려는 시인님의 마음이 모가지라는 속어에서 느껴지기도 하네요.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 노천명 시 '사슴' 중에서
화자는 우아한 사슴뿔을 보면서 지금은 짐승으로 자신 앞에 서 있는 사슴이 과거 고귀한 족속이라는 점을 상상합니다. '너'는 화자 자신의 투영일 것입니다. 이를 함께 읽는 우리도 화자에 동화되어 저마다의 삶의 페이지를 읽게 되네요.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 노천명 시 '사슴' 중에서
시인님은 억압받던 절망의 시간, 일제강점기를 오롯이 통과해야 했습니다. 이런 현실의 고통 속에서 이 시가 쓰인 20대의 시인님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해 번민했을 것입니다.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 노천명 시 '사슴' 중에서
절제의 자세가 느껴지네요. '향기로운 관'의 시절, '잃었던 전설'을 가슴 깊이 담고 있습니다. 세상사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한 자세로 높은 정신을 잃지 않고 내면을 다스려가겠다는 묵언의 몸가짐일까요?
이처럼 시 '사슴'은 일생을 고독 속에서 고고(孤高)한 품성으로 독신으로 살다 간 노천명 시인님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네요.
3. 백석을 떠올리며 시 '사슴'을 썼을까요?
노천명 시인님의 시 '사슴'과 관련해, 안도현 시인님의 흥미로운 관찰이 있습니다.
1930년대를 주름잡던 모던걸 세 사람의 대화에는 늘 백석이 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흠모하면서 때로는 조롱을 퍼부으며 백석을 대화의 안줏감으로 삼았다.
- 「백석평전」(안도현 지음, 다산책방) 중에서
여기 등장한 '모던걸 세 사람'은 소설가 최정희 님, 그리고 시인 노천명 모윤숙 님입니다. 안도현 시인님은 '노천명 시인님은 평소 사슴으로 불린 백석 시인님을 염두에 두고 시 '사슴'을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백석 시인님의 시집 「사슴」은 1936년, 노천명 시인님의 시 '사슴'은 1938년에 출간된 첫 시집 「산호림」에 실려있습니다.
(노천명의 시) '사슴'이 백석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라고 쉽게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백석이 두 해 앞서 「사슴」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냈다는 것을 노천명이 모를 리 없었다는 점,
그리고 최정희·모윤숙·노천명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에
아예 백석을 '사슴'이나 '사슴군'으로 호칭했다는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두 시편 사이의 친연성은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게 사실이다.
- 「백석평전」(안도현 지음, 다산책방) 중에서
노천명 시인님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목도 길고 잘 생긴 모던 보이 백석 시인님을 떠올리며 시 '사슴'을 썼을까요? 그건 상상 속에 남겨두는 게 더 아름답겠네요.
나중에 우리 문학사의 거목이 된 청춘들이 광화문 일대를 누비며,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장하며 질풍노도의 시간을 건넜던 풍경들을 가만히 머리에 떠올려봅니다.
아픔이 많은 시간이었겠지만 함께였기에 얼마나 다행이었을까요? 얼마나 슬프고도 아름다웠을까요? 고고한 사슴처럼요. 시 '사슴'은 아프지만 아름다움을 지향하며 나아가야만 할 우리네 삶의 표상인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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