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복 시인님의 시 '모란 송(頌)(1)'을 만납니다.
모란의 고요 속으로 들어가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수복 시 '모란 송(頌)(1)' 읽기
모란 송(頌)(1)
이수복(1924~1986년, 전남 함평)
아지랑이로, 여릿여릿 타오르는
아지랑이로, 뚱 내민 배며
입언저리가, 조금씩은 비뚤리는
질항아리를······ 장꽝에 옹기옹기
빈 항아리를
새댁은 닦아놓고 안방에 숨고
낮달마냥 없는듯기
안방에 숨고.
알길없어 무장 좋은
모란꽃 그늘 ······
어떻든 빈 하늘을 고이 다루네.
마음이 뽑아보는 우는 보검(寶劍)에
밀려와 보라(飛泡)치는
날빛같은 꽃.
문만 열어두고
한나절 비어놓은
고궁(古宮) 안처럼
저만치 내다뵈는
청자(靑瓷)빛
봄날.
▷ 이수복 전집 「봄비와 낮달」(광주광역시문인협회 엮음, 예원) 중에서
2. 유유자적하고 고아한 모란을 기리는 시
이수복 시인님의 시 '모란 송(頌)(1)'은 1968년 나온 시집 「봄비」에 실린 시입니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로 시작되는 시 '봄비'로 잘 알려진 시인 이수복 시인님의 시 '모란 송(頌)(1)'을 만나 봅니다.
모란은 크고 화사한 꽃입니다. 하지만 모란은 향기가 별로 없어 벌과 나비가 잘 모여들지 않는 꽃입니다.
제목이 '모란 송(頌)(1)'이니까, 그런 모란을 기리는(頌:기릴 송) 시입니다.
그러면 이 시는 새나 벌이나 나비도 없이 유유자적하게 피어있는 모란의 고아(高雅)한 삶을 칭송하는 노래네요.
'아지랑이로, 여릿여릿 타오르는 / 아지랑이로, 뚱 내민 배며
입언저리가, 조금씩은 비뚤리는 / 질항아리를······ 장꽝에 옹기옹기 / 빈 항아리를'
아지랑이와 질항아리들이 어우러진 봄날의 장독대('장꽝') 풍경입니다.
뒤의 2연에 나오는 '새댁은 닦아놓고'로 보아 '새댁'이 '아지랑이로' '장꽝'의 '질항아리를' 닦아놓았다는 말이네요.
아지랑이로 질항아리를 닦는다는 말은 얼마나 신비로운 말인지요?
'뚱 내민 배며' '입언저리가, 조금씩은 비뚤리는 질항아리'라는 구절에서는 봄날의 나른한 기운이 스멀거리며 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빈 항아리를'에서 편안함과 설렘이 느껴집니다.
봄날에 만물이 소생하면 그것의 온갖 것을 소재로 이 '빈 항아리'도 꽉 차게 되겠지요?
'새댁은 닦아놓고 안방에 숨고 / 낮달마냥 없는듯기 / 안방에 숨고.'
1연의 '빈 항아리'처럼 2연도 텅 비었습니다.
시 속의 고요함이 점점 증폭되고 있네요.
삶의 봄 같은 새댁이라서, 부끄러움 많은 새댁이라서 부지런히 '빈 항아리'들을 닦아놓고 안방에 숨었다고 합니다.
'낮달마냥 없는듯기'라는 표현 참 좋네요.
하늘에 떠 있지만 햇빛 때문에 보이지 않는 낮달처럼, 집에 있기는 한데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새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집안은 사람 자취 없이 고요하기만 하겠습니다.
'알길없어 무장 좋은 / 모란꽃 그늘 ······ / 어떻든 빈 하늘을 고이 다루네.'
'무장'은 '갈수록 더'라는 뜻의 부사, 또는 '무작정(無酌定)'의 방언(제주)입니다.
'갈수록 더'이든지, '무작정'이든지 어느 것이라도 괜찮겠습니다.
이 구절로 인해 참으로 이 시가 '무장' 좋아지네요.
시인님은 '모란꽃 그늘'이 '알길없어 무장' 좋다고 합니다.
문득 이 시가 생각나네요.
'항시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나는 살고 싶다'
- 조병화 시 '낙엽끼리 모여산다' 중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이 있기에' 또한 '알길 없어'서 살아갈 수 있는 것만 같습니다.
다 보이고 다 안다면 우리는 한 발도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모란꽃 그늘'이 '어떻든 빈 하늘을 고이' 다룬다는 말 또한 얼마나 신비로운 말인지요?
모란꽃에 걸려 하늘의 그늘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모란꽃 그늘이 하늘을 이리저리 옮기며 그 형상을 만든다는 말이라면 '모란꽃 그늘'은 얼마나 힘이 센지요?
세상의 한 구석 장독대 옆에서 '빈 하늘을 고이' 다루고 있는 '모란꽃 그늘'을 생각하니 숨조차 쉬기 힘든 적막의 그늘 속으로 빠져드는 것만 같습니다.
세상의 '빈 하늘'을 고이 다루는 방법을 '모란꽃 그늘'로부터 무엇이든 배우고 싶어 집니다.
새나 벌이나 나비를 기다리지 않는 담담한 모란입니다.
집 뒤란의 장독대 낮은 구석에서 몰래 피듯 피는 모란입니다.
그래도 봄날이면 자신의 성정대로 우아하게 피어나는 모란입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올려보지 않는 '빈 하늘'을 고이 다루는 모란입니다.
3. 모란이 피워내는 고결한 정적의 봄날
'마음이 뽑아보는 우는 보검(寶劍)에 / 밀려와 보라(飛泡)치는 / 날빛같은 꽃.'
3연까지 고요함이 넘치던 시의 호수에 이 4연부터 소용돌이가 치는 것만 같습니다.
봄날에 시인님은 모란을 완상(玩賞)하다가 마음이 보라 치듯 일렁이게 되었네요.
'보검(寶劍)'은 보배로운 칼을, '보라'는 ‘잘게 부스러지거나 한꺼번에 많이 가루처럼 흩어지는 눈이나 물’을 말합니다.
‘눈보라’ ‘물보라’의 쓰임이 그 예입니다. 그래서 시인님은 ‘보라’ 옆에 괄호를 치고 날 '飛(비)'와 거품 '泡(포)'자를 넣어 두었네요.
시인님의 '마음이 뽑아보는 우는 보검(寶劍)'은 시흥(詩興)이겠지요?
'날빛'은 햇빛을 말합니다.
'날빛 같은 꽃', 그만큼 찬란한 모란이 시인님의 시심(詩心)을 움직였네요. 그냥 움직인 정도가 아니라 그 '보검(寶劍)'에 번쩍하는, 이른바 '시(詩)보라'를 일으켰습니다.
아름다운 모란이 핀 장독대의 고요한 풍경과 그 속에 있는 시인님 심상(心象)의 약진(躍進)이 대비되어 그 고요함이 더 고요해졌다고 할까요?
'문만 열어두고 / 한나절 비어놓은 / 고궁(古宮) 안처럼'
이 구절의 '고궁(古宮)'에서 시인님이 칭송하는 모란을 떠올리게 됩니다.
고궁(옛 궁궐)은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곳이지만 그 영광의 무상함과 부질없음을 떠올리게도 하네요.
그래서 아무도 찾지 않아 한나절 내내 비어있는 고궁의 이미지에서 벌 나비가 잘 찾지 않아 고요한 모란의 이미지가 겹치게 됩니다.
우아하고 화사한 모란은 아득한 과거에는 고귀한 족속이었을까요?
‘한나절 비어놓은 고궁(古宮) 안처럼’ 허무의 정적, 그러나 고결한 정적을 내뿜는 모란이네요.
'저만치 내다뵈는 / 청자(靑瓷)빛 / 봄날.'
‘청자(靑瓷)빛 봄날’에서 청자의 빛깔처럼 은은한 청록색의 깊고 그윽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비어있어 조용한 고궁 안을 기웃거리듯, 고결(高潔)한 풍모의 모란 속을 기웃 들여다보고 있는 시인님의 눈길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그 시선의 끝에서 ‘봄날’이 ‘청자(靑瓷)빛’으로 피어나고 있네요.
청자의 빛깔처럼 은은한 청록색의 깊고 그윽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모란이 하나 더해진 봄날은 이처럼 고요하고 고독하고 고아(高雅)한 시간이네요.
그렇게 ‘빈 하늘을 고이’ 다루는, 세파에 휘둘리지 않은 듯 유유자적한 모란이 사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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