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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이형기 시 목련

by 빗방울이네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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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기 시인님의 시 '목련'을 만납니다.
 
목련을 만났을 때 목련의 전언(傳言)을 들을 수 있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형기 시 '목련' 읽기

 
목련
 
이형기(1933~2005년, 경남 사천)
 
맑게 살리라. 목마른 뜨락에
스스로 충만하는 샘물 하나를 
목련꽃.
 
창마다 불 밝힌 먼 마을 어구에
너는 누워서 기다렸는 진종일 ······.
 
뉘우침은 실로
크고 흡족한 침실 같다.
 
눈을 들어라.
계절의 신비여, 목련꽃
 
어둡게 저버린 옛 보람을
아, 손짓하라.
 
해 질 무렵에 청산에 기우는
한결 서운한 그늘인 채로
 
너는 조용한 호수처럼
운다
목련꽃.
 
▷「이형기 시전집」(이재훈 엮음, 한국문연, 2018년) 중에서.
 

2. 시 '목련'은 이형기 시인의 첫 시집 첫 시

 
이형기 시인님은 17세였던 1950년 「문예」지에 3회 추천을 받아 '국내 최연소 시인'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등단했습니다. 

오늘 만나는 시 '목련'은 시인님의 첫 시집 「적막강산」(모음사, 1963년)에 첫 시로 실린 시입니다.

이 첫 시집에는 국민 애송시로 불리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시작되는 시 '낙화'도 실려 있습니다.

1963년에 첫 시집이 발간되었으니 시 '목련'은 시인님 20대에 쓰인 시입니다.

시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겠지만, 오늘은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을 따라 시 '목련'을 만나러 갑니다.

'맑게 살리라'
 
'맑게 살리라'. 이 봄날 목련은 이렇게 다짐하며 맑게 맑게 피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상아색의 목련꽃 앞에 서면 누구라도 '참으로 맑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맑게 살리라'라는 다짐은 목련꽃의 마음이기도, 우리의 마음이기도 하겠네요.
 
첫 시집 첫 시의 첫 구절에 이처럼 환한 '다짐' 하나를 떡하니 걸어 놓았네요.
 
맑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스스로 부끄러움 없는 삶, 거짓 없는 삶, 남을 힘들게 하지 않는 삶이겠지요?
 
시인님은 맑은 목련을 보면서 자신 앞에 놓인 삶의 길, 시의 길을 생각했을까요?

'목마른 뜨락에 스스로 충만하는 샘물 하나를 / 목련꽃'
 
그 삶의 길, 시의 길은 '목마른 뜨락에 스스로 충만하는 샘물'의 길이기를 간구(懇求)합니다.

언제나 맑고 깨끗한 샘물 같은 시, 사람들의 '목마른 뜨락'을 적셔주는 삶을 지향하겠다는 시인님의 마음자락이 느껴지는 구절입니다.

'샘물 하나'라도 그냥 샘물이 아니라 '스스로 충만하는' 샘물'입니다.

스스로 가득 차오르는 샘물! 스스로 가득 부풀며 풍만하게 벙그는 맑고 깨끗한 목련꽃이 겹치네요.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워가는 샘물 같은 삶이란 끊임없는 참회(懺悔)와 정진(精進)의 삶일 것입니다.

'~샘물 하나를'이라고 행을 끝내고, 다음을 생략해 버렸네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는 화자의 북돋워진 감정상태가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그다음에는 새로운 하나의 시행으로 '목련꽃' 석자만을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맑고 순수하고 고결한 목련꽃의 자태가 더욱 도드라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시인님이 지향하는 삶, 걸어가고 싶은 길일 것입니다.

'창마다 불 밝힌 먼 마을 어구에 / 너는 누워서 기다렸는 진종일 ······.'

이 2연은 목련이 피기까지의 지난(至難) 한 시간을 말하는 것만 같습니다.

구절 속의 '너'는 목련꽃으로 새깁니다.

'창마다 불 밝힌 먼 마을 어구에'서 목련나무는 사람들의 마음을 밝혀줄 환한 목련꽃을 피우기 위해 인고(忍苦)의 시간을 견디고 있습니다.

'진종일(盡終日)'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라는 뜻입니다. 말줄임표 속에서 그런 '진종일'이 수없이 이어지고 있었네요.

'기다렸는'이라는 표현은 오식(誤植)이 아닙니다. '기다렸던'과 '기다리는'의 의미가 동시에 느껴지는 시인님의 조어(造語)네요.
 
'기다렸는'. 오래전부터 기다려왔고, 그 기다림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뉘앙스가 느껴지네요.

'뉘우침은 실로 / 크고 흡족한 침실 같다.'

맑고 순수한 목련꽃, 바라보면 저절로 생각이 많아지는 꽃입니다.

누구라도 그런 목련꽃을 마주한다면 그 맑고 순수함 속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겠지요.

그 모습은 세속의 온갖 욕망을 쫓다가 휘둘리고 얼룩진 모습이겠지요.

맑고 순수한 목련꽃을 보면서 화자는 그런 내면을 응시하며 쉼 없이 씻어내는 걸까요?
 
자기 성찰은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으로 가는 구원의 첫 번째 걸음일 것입니다.
 

"맑게 살리라" - 이형기 시 '목련' 중에서.

 

 

3. 목련처럼 맑고 순수한 삶을 지향하는 시

 
'눈을 들어라./ 계절의 신비여, 목련꽃'
 
촛대처럼 꽃대를 하늘을 향해 곧추세운 목련꽃이 떠오릅니다.

'눈을 들어라'.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요?

화자가 목련꽃에게 또는 목련꽃이 화자에게, 목련꽃이 자신에게 또는 화자가 자신에게 ···.

이 전언의 중의적 역할로 인해 울림이 더 깊고 넓어졌습니다.

겨울을 견디고 봄에 희고 둥근 꽃을 피우는 목련꽃입니다.
 
그처럼 화자도 눈을 들고, 정견(正見)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리라는 다짐이 느껴집니다.

'어둡게 저버린 옛 보람을 / 아, 손짓하라.'

음영(陰影)이 깊은 구절입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다양한 창문을 통해 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 실었다는 「이형기 시선」(지식을만드는지식, 정은기 엮음)에는 이 5연의 첫 구절이 이렇게 타이핑되어 있습니다.

'어둡게 저 버린 옛 보람을'

「이형기 시전집」에는 '저버린'인데, 「이형기 시선」에는 '저 버린'으로 되어 있네요.

'저버린'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의리를 잊거나 어기다'라는 뜻이고, '저 버린'은 '저를 버린'의 의미일 것입니다.

두 경우의 공통점은, 화자 또는 목련의 놓쳐버린 지난 시간의 가치('옛 보람')에 대한 회환이 느껴진다는 점일 것입니다.

'아, 손짓하라'

실수와 부끄러움, 후회와 절망으로 점철된 지난 시간일지라도 그건 '스스로 충만하는 샘물'로 가는 시간 아니겠는지요?  

그 시간을 향한 손짓일까요? 

'해 질 무렵에 청산에 기우는 / 한결 서운한 그늘인 채로'

이 구절에도 깊은 음영이 깃들어 있네요.

'서운한'은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의 뜻이지만 '시원하다'의 방언(강원, 경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서운한 그늘'은 아쉽거나 섭섭한 마음, 시원한 촉감이 뒤섞여 시 속에서 오묘한 느낌을 주는 시어입니다.

한낮의 햇살이라면, 생명력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해 질 무렵에 청산에 기우는' '그늘'이라면, 냉정과 고요 그리고 관조의 질감이 느껴지네요.

'너는 조용한 호수처럼 / 운다 / 목련꽃.'

'운다'는 '눈물을 흘리다'는 뜻과 함께 '흔들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조용한 호수'가 잔잔한 물결로 흔들리는 모습이 떠오르는 구절입니다.

그 흔들림이 울음이라면 그것은 격렬한 울음이 아니라 깊지만 조용하고 담담한 울음이겠습니다.

그 울음은 물론 화자의 내면에서 번져 나오는 울음이겠지만요.

바람에 가만히 흔들리는 '목련꽃'을 보면서 화자는 목련꽃과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자신도 목련꽃처럼 가만히 흔들리며 울고 있네요.

그 울음을 '조용한 호수'의 울음이라고 합니다.

호수처럼 고요하고 깊은 울음은 내면을 성찰하고 정화하여 평온을 되찾는 환희의 울음일까요?

이형기 시인님은 '호수'를 참 좋아합니다.

오늘의 시 '목련'이 실린 시집 「적막강산」에 '호수'라는 제목의 시가 있습니다.

시인님은 그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사랑은 나를 울리지 않는다 / 조용히 우러르는 / 눈이 있을 뿐이다'

'사랑이 나를 울리지 않는다'라고 합니다. 사랑이 호수 같은 나를 울릴 수 없다는 말이겠네요. 

호수/나가 흔들리는 것은 조용히 우러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시인님은 세속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흔들림 없이 높은 곳을 우러르는 호수처럼 깊은 눈을 갖고자 했네요.

그런 시인님을 떠올리며 첫 시집의 첫 시 '목련'의 첫 구절로 시인님이 걸어놓은 문장을 다시 새겨봅니다.
 
'맑게 살리라'
 
이제 목련꽃을 만나게 되면, 목련처럼 맑게 살고자 했던 시인님의 시를 떠올리며 우리도 다짐하게 되겠네요.
 
'맑게 살리라'
 
이 한 마디를 목련으로부터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우리는 얼마나 운이 좋은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이형기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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