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삼 시인님의 시 '걷자'를 만납니다. 시인님의 고독이 진하게 느껴지는 시입니다. 그 고독이 오로지 시인님만의 것일까요? 시인님이 건네주는 고독의 심연에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종삼 시 '걷자' 읽기
걷자
- 김종삼
방대한
공해 속을 걷자
술 없는
황야를 다시 걷자
- 「김종삼 전집」(권명옥 엮음·해설, 나남출판) 중에서
김종삼 시인님(1921~1984)은 황해도 은율(殷栗) 출신으로 평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47년 월남했습니다. 동아방송 제작부에서 음악연출을 담당하며 음악과 시와 더불어 평생을 살았습니다. 1953년 「신세계」에 시 '원정(園丁)'을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 1969년 첫 시집 「십이음계」를 비롯 「시인학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등 세 권의 시집, 「북치는 소년」 「평화롭게」 등 두 권의 시선집을 냈습니다. 현대시학 작품상, 한국시인협회상, 대한민국문학상 등을 받았습니다.
2. 고독한 이방인이 간파한 우리네 삶의 모습
김종삼 시인님은 이런 분이었습니다.
온 가족과 함께 1947년 봄 월남했을 때,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으며
이후 낯선 남한(서울)에서 지독한 가난과 소외에 갇힌 채 38년 간 살았습니다.
- 「김종삼 전집」(권명옥 엮음·해설, 나남출판) 중에서
이방인의 삶이었습니다. 27세부터 낯선 남한에서 63세의 일기로 서울 성수병원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고독한 방랑자였네요.
그에게 해방은 남북의 분단이자 고향 상실이었다.
가족들이 재산과 터전을 잃고 피난민으로 전락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한 어둠이 앞을 가로막았다.
피난 체험과 그 뒤로 이어진 전쟁 체험은
예술 애호가로 살고자 했던 그의 마음을 심각하게 타격했다.
- 「김종삼의 시를 찾아서」(이숭원 지음, 태학사) 중에서
남북 분단과 한국전쟁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 상처가 쉽게 치유되겠는지요?
오늘 만나는 그의 시 '걷자'는 1977년 「현대시학」 1월호에 발표되면서 세상에 나왔습니다. 시인님 57세 때네요. 이 나이라면 낯선 땅 남한에서 30년을 살았을 시기인데, 아직 그의 외로움은 이토록 진하네요.
걷자!
이 시의 제목 '걷자'는 누군가에게 청하는 어투입니다. 시 속에도 '걷자'가 두번 나오는데, 이는 타인에게 권하는 말이 아닌 자신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독백 또는 다짐이랄까요.
이 시는 4행으로 구성되었는데, 행 사이를 넓게 벌려두고 있습니다. 이런 배치로 우리의 의식에도 여백이 생기네요. 좀 천천히 시를 음미해 달라는 시인님의 눈짓이네요.
방대한 // 공해 속을 걷자
- 김종삼 시 '걷자' 중에서
여기서 '공해'라는 시어가 눈에 걸립니다. 시인님은 왜 공해라고 했을까요? '드문 미학주의자'로 꼽히는 시인님이 아름다운 시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이런 단어를 왜요?
'공해'라는 단어에서 숨이 턱 막히네요.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것만 공해일까요? 우리 마음은요, 우리 관계는요, 우리 사랑은요. 시인님은 모든 것이 오염된 세상, 공해 속에 고립되어 있네요. 깨끗한 물도, 맑은 공기도 없고요, 세상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네요.
심지어 그런 공해가 방대하다고 하네요. 그러나 시인님은 '걷자'고 합니다. 스스로에게요. 방대한 공해 속을 걸어가는, 앞으로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의 존재라는 것을 느낍니다.
3. 그대는 이 방대한 공해 속을 어떻게 걷고 있나요?
술 없는 // 황야를 다시 걷자
- 김종삼 시 '걷자' 중에서
술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황야라고 하네요.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술 한 잔 앞에 두고 내 심사를 뒤집어 보일 사람이 없다는 말이네요. 세상에 왜 술이 없겠는지요? 그 술을 함께 마실 마음 맞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 정다운 사람이 없는 낯선 세상은 바로 인적이 없는 황야(荒野)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 황야를 '다시 걷자'고 하네요. 참으로 들어가기 싫고 두려운 황야지만 '다시 걷자'라고 스스로를 추스르네요. 여기서 시인님의 목소리는 다분히 체념한 듯한 자조적인 목소리네요. 그래서 시인님의 외로움이 더욱 진하게 다가옵니다.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꿈속처럼 발이 내디뎌지지 않는 답답함이 느껴지네요.
북녘에 고향을 두고 30년이나 서울 생활을 했지만 시인님은 서울에서 정을 붙이지 못했네요. 그에게 세상은 방대한 '공해'로 가득한 낯선 '황야'였네요. 가여운 시인님!
그런데 시인님만 그럴까요?
시인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대는 이 방대한 공해 속을 어떻게 혼자 걷고 있느냐고요. 이 낯선 황야 같은 삶의 거친 들판을 어떻게 혼자 걷고 있느냐고요? 사랑도, 다정도 없이요. 이 존재의 외로움을 어떻게 할까요? 삶의 고독함을요.
오늘 누구라도 앞에 두고 술 한잔 나누어야겠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종삼 시인님의 시 한편 더 읽어보세요.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석 시 하답 읽기 (71) | 2023.08.10 |
---|---|
틱낫한의 사랑법 읽기 (60) | 2023.08.09 |
신경림 시 갈대 읽기 (62) | 2023.08.07 |
김현승 시 플라타너스 읽기 (63) | 2023.08.06 |
김규동 시 느릅나무에게 읽기 (59) | 2023.08.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