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인님의 시 '이 하찮은 가치'를 읽습니다. 조금 긴 시인데 읽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시입니다. 시인님이 길어 올린 맑은 우물물로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용택 시 ‘이 하찮은 가치’ 읽기
이 하찮은 가치
- 김용택
11월이다.
텅 빈 들 끝,
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있다.
어둠이 온다.
몇 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
지나온 마을보다
다음에 만난 마을이 더 어둡다.
그리고 불빛이 살아나면
눈물이 고이는 산을 본다.
어머니가 있을 테니까. 아버지도 있고.
소들이 외양간에서
마른풀로 만든 소죽을 먹고,
등 시린 잉걸불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고구마가 익는다.
비가 오려나보다.
차는 빨리도 달리다. 비와
낯선 마을들,
백양나무 흰 몸이
흔들리면서 불 꺼진 차창에 조용히 묻히는
이 저녁
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무런 까닭 없이
남은 생과 하물며
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
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
나는 비로소 내 형제와 이웃들과 산비탈을 내려와
마을로 어둑어둑 걸어 들어가는 전봇대들과
덧붙일 것 없는 그 모든 것들에게
이렇게 외롭지 않다.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
이 무한한 가치로
그리고 모자라지 않으니 남을 리 없는
그 많은 시간들을 새롭게 만들어준, 그리하여
모든 시간들이 훌쩍 지나가버린 나의 사랑이 이렇게
외롭지 않게 되었다.
- 김용택 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창비, 2013) 중에서
김용택 시인님은 1948년 전북 임실 출신으로 1982년 창작과비평사 21인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로」에 ‘섬진강 1’ 등을 발표하며 시작활동을 했습니다. 시집으로 「섬진강」을 비롯,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꽃산 가는 길」 「강 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나무」 「그래서 당신」 「수양버들」 「속눈썹」 등이 있습니다. 산문집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오래된 마을」 「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의 섬진강 이야기」 등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등이 있습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윤동주상문학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그대에게 하찮은 가치는 무엇인가요?
시 ‘이 하찮은 가치’가 실린 김용택 시인님의 시집 「키스를 원하지 않는 입술」이 2013년에 나온 것으로 보아 이 시는 시인님 60대 초중반 즈음에 쓰인 시로 보입니다. 시집의 첫 번째 시가 바로 이 시입니다. 그만큼 시인님이 시집의 많은 시들 가운데 가장 내세우고 싶은 ’대표 주자‘인 셈입니다. 얼마나 예쁘길래요?
11월이다 / 텅 빈 들 끝, / 산 아래 작은 마을이 있다
- 김용택 시 ‘이 하찮은 가치’ 중에서
계절은 봄 여름 가을을 거쳐 겨울에 도착했고, 시의 화자도 청년기와 장년기를 거치면서, 삶의 희로애락을 통과하면서 생의 황혼기에 도착했습니다. 산 아래 작은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어둠이 온다 / 몇 개의 마을을 지나는 동안 / 지나온 마을보다 / 다음에 만난 마을이 더 어둡다
- 김용택 시 ‘이 하찮은 가치’ 중에서
지금 그대도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저녁의 집으로 가는 중인지요? 시인님은 작은 산골마을에 집이 있어서 그의 귀갓길은 점점 산골로 들어가는 길이네요. 깊은 산골마을일수록 어둡겠지요. 그런데요, 이 구절은 ‘지나온 시간보다 다음에 만난 시간이 더 어둡다’로 읽힙니다. 그대의 시간도 그렇지 않았던가요? 알 수 없는 시간은 때때로 얼마나 깜깜한지요?
그리고 불빛이 살아나면 / 눈물이 고이는 산을 본다
- 김용택 시 ‘이 하찮은 가치’ 중에서
‘눈물이 고이는 산’은 이 시를 높은 곳으로 올려줍니다. 우리의 사연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빗방울이네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문득 커다란 산 하나가 ‘내 편’이 되는 든든한 느낌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가난한 마을에 어찌어찌하여 작은 불빛이라도 살아나면, 꺼졌으리라 절망했는데 어두운 시간을 뚫고 작은 희망이라도 생기면 얼마나 좋겠는지요? 그런 애절한 사연들을 속속들이 다 아는 자연이네요. 옆에서 가까이에서 다 지켜보았으니까요.
어머니가 있을 테니까. 아버지도 있고
소들이 외양간에서 / 마른풀로 만든 소죽을 먹고
등 시린 잉걸불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 고구마가 익는다
- 김용택 시 ‘이 하찮은 가치’ 중에서
이 구절들을 읽으며 문득 시 제목 ‘이 하찮은 가치’를 올려다보게 되네요. 시의 화자는 낮에 도회지에서 볼 일을 보고 저녁이 되어 산골마을에 있는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 문명의 중심에서 좌충우돌 찾아 헤맨 것은 무엇인지요? 시의 화자는 어떤 ‘대단한 것’을 만났을까요?
아니라고 하네요.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고, 마른풀로 허기를 채우는 소들이 있고, 불속에서 고구마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익는 집이 있다고 하네요. 도회지로 가면서, 이것들을 등지고 ‘대단한 것’을 찾으러 가면서, 어쩌면 이들을 하찮은 것들이라 여겼을까요?
그런데 사실은 ‘이 하찮은 가치’ 말고 어떤 대단한 가치가 따로이 있겠는지, 시의 화자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3. 그대는 두려움과 비밀이 있습니까?
지금 이렇게 아내가 밥 짓는 마을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무런 까닭 없이 / 남은 생과 하물며 / 지나온 삶과 그 어떤 것들에 대한
두려움도 비밀도 없어졌다
- 김용택 시 ‘이 하찮은 가치’ 중에서
그대는 어떤 두려움과 비밀이 있습니까? 시인님은 이렇게 묻고 있네요.
두려움과 욕망은 늘 붙어다니는 단짝인 것만 같습니다. 욕망을 채우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내게 채워진 욕망을 잃게 될 것에 대한 두려움.
그 욕망을 채우고 유지하려면 얼마나 ‘엉터리’ 같은 비밀이 필요하겠는지요? 이 대목에 이르러 우리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님의 묘비명이 떠오릅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 나는 자유다
I hope for nothing / I fear nothing / I am free
- 니코스 카잔차키스 묘비명
이렇게 시의 화자는 삶의 문제들을 다 풀어버린 듯합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 어떤 것들에‘ 대해서도 두려움이나 비밀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복잡한 고차 방정식 같은 삶의 해법은 무얼까요? 시의 화자는 ’이 하찮은 가치‘야말로 우리를 자유로움으로 이끌어준다고 말하고 있네요.
혼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 지금의 이 하찮은, 이유가 있을 리 없는
이 무한한 가치로 (중략)
외롭지 않게 되었다
- 김용택 시 ’이 하찮은 가치‘ 중에서
그래서 ‘하찮은 가치’를 ‘무한한 가치’라고 합니다. 가치의 위계(位階)는 어떤 것이 본래 그런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욕망이 어디에 머물렀던가가 문제였겠습니다. 문득 17세기 네덜란드의 ‘튤립 공황’ 생각나네요.
그렇게 하찮은 가치를 무한한 가치로 인식하게 된 순간, 시의 화자는 ‘외롭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빗방울이네, 지금 눈을 감고 시인님이 되어 생각해 봅니다. 저녁에 산골의 작은 마을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집에 있고요, 마른풀이면 행복해하는 누렁소가 집에 있고요, 휘파람 소리를 내며 익어가는 단고구마가 집에 있네요. 빗방울이네에겐 없는 것이 시인님에겐 다 있네요.
아, 세상 그 무엇이 부럽겠는지요? 참말로요.
책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용택 시인님의 시 한 편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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