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천 시인님의 동시 '보슬비의 속삭임'을 듣습니다. 마법 같은 시입니다. 이 동시를 읽으면 순식간에 빗방울이 되고 아이가 됩니다. 시인님의 순진무구한 속삭임을 들으며 마음을 맑히며 함께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강소천 동시 '보슬비의 속삭임' 읽기
보슬비의 속삭임
- 강소천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풀밭으로 갈 테야.
파란 손이 그리워 풀밭으로 갈 테야.
- 「강소천 문학전집 1 동시·동요 - 보슬비의 속삭임」(김동리 박목월 윤석중 최태호 엮음, 문음사, 1981) 중에서
강소천 시인님(1915~1963)은 함경남도 고원 출신으로 16세 때인 1930년 「아이생활」에 실은 '버드나무 열매'가 동시의 공식 지면 발표작이며, 1940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동화 '전등불의 이야기'가 당선했습니다.
1941년 동요 시집 「호박꽃 초롱」이 출간된 것을 비롯, 동화집 「조그만 사진첩」 「꽃신」 「진달래와 철쭉」 「꿈을 찍는 사진관」 「종소리」「무지개」「인형의 꿈」 「대답 없는 메아리」 「어머니의 초상화」 「그리운 메아리」 등과 동화 동시 선집 「강소천 아동문학독본」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5월 문예상, 금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강소천 시인님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소천아동문학상이 제정·운영되고 있습니다.
2. 울적할 때면 자동 재생 되는 노래
'보슬비의 속삭임'은 1936년 「아이생활」 6월호에 발표되었으니 강소천 시인님 21세 때 쓰인 동시네요. 지금(2023년)으로부터 87년 전의 동시네요.
이 동시는 김성도 작곡가님이 곡을 붙인 '이슬비의 속삭임'이란 제목의 동요가 되었습니다.
이 정다운 노래는 빗방울이네의 '주제가'라 할만합니다. 빗방울이네 울적해질 때면 자동으로 이 노래 나옵니다. 누가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요. 아마 그 복잡해진 마음을 '나는 나는 갈 테야'라고 외치면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이 노래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 강소천 동시 '보슬비의 속삭임' 중에서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에 배운 노래가 성인이 되어서도 흥얼거리게 되다니요. 이 구절을 흥얼거릴 때면 빗방울이네는 정말로 빗방울이 되어 공중에 사선을 그으며 둥둥 떠다니는 기분에 빠져듭니다. 마법처럼요. 그리고는 연못으로 훨훨 날아가는 거죠.
이런 느낌을 뭐라고 할까요, 한 서너 살쯤의 아이가 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이 구절을 흥얼거리는 중에 누가 말을 시키면 괜스레 아이 말투가 나오곤 합니다. 혀짤배기소리요. 거참.
그런데요, 빗방울이네는 이런 순간, 이런 느낌이 참 좋기도 합니다. 아이가 되어, 빗방울이 되어 공중을 둥둥 떠서 연못으로 가는 일은 환상이지만 얼마나 신이 나는 환상인지요. 환상 속에서 연못으로 가서 수면 위로 몸을 툭 던져봅니다. 아, 동그라미! 동심원을 그리며 번져가는 저 동그라미들 좀 보셔요!
나는 나는 갈 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 강소천 동시 '보슬비의 속삭임' 중에서
우리 함께 빗방울이 되어 이젠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갑시다. 사실 빗방울이네는 손으로 꽃봉오리 절대 만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꽃봉오리가 아플 테니까요. 대신 빗방울이 되어 만지는 일은 얼마나 좋은 일인지요. 꽃봉오리에게도 빗방울이네에게도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지요. 벌써 향긋한 꽃향기가 빗물에 녹아 꽃물 되어 흐르네요.
그런데요, 이 시의 3개 연에서 반복되는 있는 '나는 나는 갈 테야' 하는 화자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나는 나는 갈 테야, 풀밭으로 갈 테야 / 파란 손이 그리워 풀밭으로 갈 테야
- 강소천 동시 '보슬비의 속삭임' 중에서
이 시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6년에 발표됐습니다. 현실의 고통 속에서 청년 강소천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 3연에 나오는 '파란 손'은 그냥 풀일까요? 억압의 고통이 없는 자유와 평화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아니었을까요?
3. '어린이 마음 그대로 맑고 순수하고 눈이 초롱 같다'
위의 같은 시집에 실린, 비를 소재로 한 짧은 시 한 편 더 읽습니다.
장난꾸러기 소나기가 / 길 가는 사람들을 / 뛸내기를 시켰읍니다
- 강소천 동시 '소나기(1)' 전문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자, 사람들이 일제히 거리를 질주하는 장면이 눈에 환하게 보이네요. 시인님은 그 장면을 보고 하하하 아이처럼 웃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이 시집의 맨 뒤쪽에 윤석중 시인님의 글 '소천의 세계'가 실려 있습니다. 이 글에서 윤석중 시인님은 강소천 시인님의 순진무구한 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린이 마음을 지녀야만 하느님 곁에서 귀여움을 받을 수 있음을 굳게 믿은 그의 신앙심에서 우러났으리라
- 「강소천 문학전집 1 동시·동요 - 보슬비의 속삭임」
그랬군요. 강소천 시인님 마음은 어린이 마음이었군요. 그렇게 언제나 어린이 마음이었으니 어린이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천진난만한 시를 쓸 수 있었군요.
1963년 5월 강소천 시인님 타계 후 지인들의 추모 문장 중 2가지를 소개합니다.
동심만으로 살다가 동심의 나라로 되돌아간 소천 형은 아기처럼 고요히 잠들어 있다
- 「강소천 평전」 중 조지훈 시인님의 글 중에서
어린이 마음 그대로 맑고 순수하고 눈이 초롱 같다
- 「강소천 평전」 중 정연희 소설가님의 글 중에서
네, 오늘 '보슬비의 속삭임'을 읽어보니, 이렇게 순진무구한 아이 마음으로 살다 간 강소천 시인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고 있음을 알겠습니다.
보슬비가 되어 연못에 동그리미를 그리고, 꽃봉오리를 만지고, 파란 손을 만나고 있었네요.
그렇게 '이슬비의 속삭임'이라는 노래로 우리의 상처 입은 마음도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네요. 고맙습니다, 아이 같은 시인님!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강소천 시인님의 대표 동시, 한국 대표 동시 '닭'을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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