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비둘기'의 시인, 김광섭 시인님의 시 ‘아기와 더불어’를 만납니다. 시인님은 이 시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비기 하나를 넌지시 건네주네요. 뭘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광섭 시 '아기와 더불어' 읽기
아기와 더불어
- 김광섭
꽃은 어데서 나는지 모르고 핀다
아기도 어데서 나는지 모르고 웃는다
아기는 울지만 우는 것도 피는 것이다
걸음마를 타면
장난감과 논다
의식이 생기고 의지가 선다
아빠 엄마도 거역한다
말을 타다가 오토바이를 타다가
세 바퀴 차에 앉았다가
택시를 몰다가
인형을 안고 과자를 먹다가
트럭에 걷어싣고
나팔을 불고
한참 잊었던 엄마 아빠 곁에 간다
자유다! 버린 듯이 부려놓는다
하나씩
놓아주고는
무너뜨리고 흩어버린다
어른들이 배워준 질서가 허물어진다
장난감들이 해방된다
TV에서 다이빙하면
소파 아래 물이라 만들어 놓고
두 팔을 앞으로
풍덩 뛰려는 순간
어머나 현아 현아 안돼 안돼
이불 위해 보자기를 씌워
봉우리를 만들어주면
올라가 미끄럼 탄다
용이 폭포 속에 들어가면
용이 되어 같이 들어갔다가 같이 나온다
어른은 잘해 준다는 뜻인데
그 천성과 자연에 간섭한다
아기는 혼자 있지 못한다
아기의 고독은 우는 것이다
아기는 가만 있지 못하는 임금이다
아기가 보는 것은
장난감이 가득찬 세상이다
아장아장 걸어서 임금은 가신다
산 위에 뜬 달도 달란다
고무풍선을 주면 달이 된다
모든 것은 장난감
살아서 숨쉰다
아기는 어른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상을 찌푸리면
엄마 아빠 할아버지 주책바가지들!
아기는 어른 속에도 있다
그대로 가만 보는 것이 사랑이요 자애(自愛)다
어른은 천사의 상태에서만
아기의 천진(天眞)에 통한다
그때 아기에게 손을 잡혀
밖에 나가면
아기와 같이 하늘로 간다
길이 험한데 가면
할아버지! 한다
할아버지는 어진 교통순경이 된다
사람과 사람 어느 사이보다도
아기와 할아버지는 제일 가깝다
아기는 어른의 질서보다도
장난감의 무질서 속에 산다
할아버지는 그 여백(餘白) 속에 있다
- 「김광섭 시전집」(일지사, 1974) 중에서
김광섭 시인님(1905~1977)은 함경북도 출신으로 1927년 「알」지에 시 '모기장'을 발표했고, 「해외문학연구회」(1928), 「문예월간」(1931) 동인 등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8년 첫 시집 「동경」을 비롯 「마음」 「해바라기」 「성북동 비둘기」 「반응」 등의 시집, 자전문집 「나의 옥중기」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건국포장, 건국훈장 애국장 등이 추서 되었습니다.
2. 아기의 천진난만함과 통하는 길은?
요 며칠 사이 김광섭 시인님의 시 '아기와 더불어'가 너무 좋아서 머릿속에 넣어두고 꺼내 읽곤 했는데요, 이게 무슨 행복인지요? 빗방울이네, 갑자기 아기와 더불어 하루를 지내게 됐습니다. 어린이집이 여름휴가라 그 집의 아기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네요.
요즘 이웃에 아기를 잘 볼 수 없어서, 아기를 좀 봐 달라는 연락을 받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짝지 풀잎과 함께 아침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풀잎은 자기 짝지에게도 안 사주는 골드키위를 아기에게 준다면서 한 봉지 사들었네요. 흥칫뽕!
우리가 이날로 360일째인 그 아기의 집에 도착했을 때 아기는 침대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었어요. 어찌나 이쁘던지요! 발그레한 복숭아가 하나씩 양쪽 뺨에 달라붙어 있었어요! 숨을 죽이며 가까이 가보았어요. 아기의 배가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어요. 배로 호흡하는 중인 거죠. 이렇게 아기처럼 복식호흡을 해야 호흡이 깊어져서 노래도 잘하고 단소도 잘 불게 되는데, 사람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호흡이 위로 올라와 나중에는 가슴으로 얕은 호흡하게 된다고 하네요. 아가야. 넌 어찌 그리 복식호흡을 잘도 하누!
어른은 잘해 준다는 뜻인데 / 그 천성과 자연에 간섭한다
- 김광섭 시 '아기와 더불어' 중에서
아기에게는 아기의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어른은 종종 잊곤 하지요. 어른은 어른의 시선으로 아기를 보니까요. 설탕이나 소금이 든 간식도 안 된다니까요. 아기를 돌보려면 빨리 '아기 모드'로 전환해야겠네요!
아기가 보는 것은 / 장난감이 가득 찬 세상이다 / 아장아장 걸어서 임금은 가신다
- 김광섭 시 '아기와 더불어' 중에서
이날 아기는 임금이네요. 어른들을 자신의 신하로, 장난감으로 만들었어요. 빗방울이네와 풀잎이 무릎을 꿇고 엉금엉금 기어가게 했고요, 평소 잘 안 짓던 예쁜 표정을 짓게 했고요, 평소 잘 안 하던 혀짤배기소리도 하게 했고요, 장난감 대문 사이로 통과하게 했고요. 심지어 동요에 맞추어 춤도 추게 했어요. 아, 오늘 도리도리 까꿍 너무 많이 해 머리가 어질 거리네요. 아기는 마법사네요. 아마 그 장면들을 녹화해 두었더라면 참으로 가관도 아니었을 거네요. 거참.
아기는 어른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 상을 찌푸리면
엄마 아빠 할아버지 주책바가지들!
- 김광섭 시 '아기와 더불어' 중에서
다 던져버리네요. 어제 산 전자손목시계를 쥐어줬더니 보다가 던져버리네요. 금덩이를 쥐어줘도 아기에겐 장난감, 가지고 놀다 던져버리겠지요? ‘가치’는 어른들의 세계, 아기에겐 그 모두가 장난감이네요.
어른은 천사의 상태에서만 / 아기의 천진(天眞)에 통한다
- 김광섭 시 '아기와 더불어' 중에서
그런데요, 이날 아기는요, 짝지 풀잎과는 금방 친해졌는데 빗방울이네는 아니었네요. 아무리 예쁜 표정으로 애교를 떨고 아기 목소리를 흉내 내며 다가가도 자꾸 도망가는 거예요. 평소 버스에서 만난 아기를 보고 웃으면 금방 따라 웃어주곤 했는데 오늘은 영 실망이네요.
시인님의 전언처럼 '천사의 상태'가 되지 못해 '아기의 천진'과 연결되지 못해서일까요? 빗방울이네 속의 천사는 얼마나 깊숙이 숨어버린 걸까요? 아기는 말하는 것만 같네요. 요즘 덥다고 자주 맥주 마셨지? 꼭 필요하지도 않은 전자손목시계는 왜 사누? 욕망에 끌려다니며 사는 모습 다 보여! 아기의 눈에만 보이는 걸까요? 빗방울이네 얼굴에 욕망의 더께가 달라붙어 있어서 아기는 멀리 도망가는 걸까요? 빗방울이네 부디 각성하세요! 넵, 천사님!
3. 마음의 눈으로 보는 법, 아기한테 배운다
그때 아기에게 손을 잡혀 / 밖에 나가면
아기와 같이 하늘로 간다 / 길이 험한데 가면 / 할아버지! 한다
- 김광섭 시 '아기와 더불어' 중에서
이 시 '아기와 더불어'는 1972년 11월 1일 「창작과비평」에 발표되었습니다. 김광섭 시인님 68세 때네요.
위의 책 「김광섭 시전집」 앞부분에 시인님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수십 장의 흑백 사진들이 실려 있습니다. 거기에 시인님이 아기 뺨에 뽀뽀를 하는 사진이 있습니다. '손자 성원을 안고'라고 사진 설명이 되어 있네요. 김광섭 할아버지는 너무 좋아 눈을 지그시 감았고 아기는 실눈을 떴는데요, 약간 찌푸리고 있네요. 아기 뺨에 뽀뽀하는 사진이 실린 시인의 시전집은 처음 보네요. 그만큼 시인님은 아기를 좋아하셨네요.
이렇게 고된 세상에서 이런 순수성과 단순성을 지키기 위하여
나는 내 마음의 자성(自性)을 지키려고 우선은 물욕부터 버리기에 힘썼다.
시에 있어서 진미(眞美)에 이르는 첩경은 단순성에 있다.
이 단순성에 이르는 길은 만물을 보는 눈이 마음에서 열려야 한다.
나는 항상 부족을 느끼고 남이 말하기 전에 말하지 않고
비록 물체라 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면 그 앞에서 겸손하다.
내가 거만해도 무방한 만큼 못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듯 만인이 다 신의(神意) 있음을 느낀다.
사람 가운데 가장 천진한 것이 아기인 까닭에 아기와 있는 것이 나의 생활의 큰 부분이다.
- 「시와 인생에 대하여」(김광섭 지음, 한국기록연구소, 2014) 중에서
참 정다운 말씀이네요. 시의 참다운 아름다움에 이르는 길은 순수성과 단순성에 있고, 그러려면 마음에서 눈이 열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요, 아기가 그런 눈을 가진 이라서 아기와 있는 것이 시인님의 생활의 큰 부분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시의 백전노장이신 시인님이 아기한테서 그런 마음의 눈을 배운다는 거네요!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구절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가 생각나네요. 백전노장들은 왜 이렇게 아기한테 배워야 한다고 할까요? 아이는 천사니까요. 아기는 어른이 잃어버린 천진난만함, 때 묻지 않은 사람의 본래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우리, 아기한테 한 수 배웁시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천진난만함을 자꾸 꺼내 사용하자구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광섭 시인님의 시를 더 읽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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