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균 시인님의 시 '설야(雪夜)'를 만납니다.
눈이 오는 소리를 '먼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라는 구절로 표현한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광균 시 '설야(雪夜)' 읽기
설야(雪夜)
김광균(1914~1993년, 경기도 개성)
어느 먼 -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서글픈 옛 자쵠양 흰눈이 나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김광균 문학전집」(소명출판, 오영식·유성호 엮음, 2014년) 중에서.
2. 1938년의 원본과 함께 시 '설야' 감상하기
'먼곳에 여인의 옷벗는 소리'라는 구절로 유명한 김광균 시인님의 시 '설야(雪夜)'를 만납니다.
김광균 시인님의 대표시 '설야(雪夜)'는 시인님 25세 때인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1등으로 당선한 시입니다.
이 시는 이듬해 나온 첫시집 「와사등(瓦斯燈)」(남만서점 1939년 발행)에 실렸습니다.
위에 소개된 「김광균 문학전집」에는 시집 「와사등(瓦斯燈)」 영인본이 실려 있습니다.
이 귀중한 영인본이 있어 우리는 이 시가 처음 발표 당시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래에 주황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영인본에 실린 시 '설야'입니다.
밤눈을 만나면 그대는 어떤 생각이 드는지요?
어느 먼 -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 이 한밤 소리없이 흩날리느뇨
어느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 이 한밤 소래없이 흣날리느뇨
밤눈을 만난 시의 화자는 밤눈이 마치 먼곳으로부터 오는 '그리운 소식' 같다고 하네요.
이는 시의 화자가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겠습니다.
화자의 마음 속에는 지금 그리움이 눈처럼 소리없이 흩날리고 있네요.
우리는 누구라도 눈이나 비가 오면 불쑥 그리운 이가 떠오르지 않던가요?
그 사람도 지금 내리는 눈을 보고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한밤에 잠들지 못하고 서성이면서요.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 서글픈 옛 자쵠양 흰눈이 나려
첨하끝에 호롱불 여위어가며 / 서글픈 옛자쵠양 힌눈이나려
시간이 지날수록 가물가물 수그러드는(여위어가는) 호롱불입니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말입니다.
화자가 밤눈 내리는 밖을 내다보면서 오래 잠들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는 말이겠네요.
옛생각에 잠겨서요.
'서글픈 옛 자쵠양(자취인 양)'이라는 구절에서 서글픔이 흰눈처럼 쌓이고 있는 화자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네요.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하이얀 입김 절노 가슴이메여 / 마음 허공에 등불을 키고 / 내홀노 밤깊어 뜰에나리면
'내 홀로 밤 깊어 뜰어 나리면'. 이 구절이 절묘하게 다가옵니다.
이 구절은 화자가 홀로 밤이 깊은 뜰에 나갔다는 말일텐데요,
그리운 이와 떨어져 혼자있는 내 마음도 밤처럼 캄캄하게 깊었다는 뉘앙스가 전해져 옵니다.
화자의 헤아릴 수 없는 외로움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라는 구절이 더 실감나게 다가오네요.
3.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에 담긴 뜻은?
시 '설야'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이 바로 한 줄로 된 이 4연입니다.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먼-곳에 女人의 옷벗는소래
봉창(封窓) 같은, 한지를 바른 문에 눈발이 스칠 때 사르륵사르륵 소리를 냅니다.
그 소리가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같다고 하네요.
이 구절에서 우리는 한복을 벗을 때 나는 사르륵사르륵 소리가 연상됩니다.
이 '여인'은 지금은 헤어졌지만, 여전히 화자가 애타게 그리워하는, 앞의 '옛자취' 속의 주인공이겠지요?
눈발이 봉창을 스치며 내는 소리에서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떠올린 화자입니다.
한편으로는 관능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눈처럼 정결하고 청순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화자를 따라 우리의 그리움과 외로움도 아득하게 증폭되는 구절입니다.
희미한 눈발 /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追憶)의 조각이기에 /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희미한 눈ㅅ발 /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 싸늘한 追悔 이리 가쁘게 설네이느뇨
'설레이느뇨'. '설레다'는 '마음이 가라앉지 아니하고 들떠서 두근거리다'라는 뜻도 있지만,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자꾸만 움직인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쓰임이겠습니다. 산란한 마음 말입니다.
'추회(追悔)'란 지나간 일이나 사람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희미한 눈발' = '싸늘한 추회(追悔)'라고 합니다.
호롱불 너머로 흩날리는 '희미한 눈발'이 '싸늘한 추회처럼 가쁘게' 설레인다고 하네요.
그리움과 외로움에 방황하는 화자의 어지럽게 일렁이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것만 같습니다.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 흰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한줄기 빗도 향기도 없이 / 호을노 차단한 衣裳을 하고 / 힌눈은 나려 나려서 싸여 / 내슬픔 그우에 고히서리다
'차단한 의상'은 이 시의 문제적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차디찬 의상' '찬란한 의상' 등으로 잘못 옮겨져 읽히곤 합니다.
그러나 보시는 바와 같이 시집 초판 영인본에도 '차단한 衣裳'이라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차단한'은 흐릿하고 아득한 감각을 전해주는 김광균 특유의 조어인데,
이 어휘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상실감과 슬픔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위 책 「김광균 문학전집」의 해제 '김광균시의 문학사적 의미'(유성호 글) 중에서.
그랬네요. 김광균 시인님은 시 '설야' 뿐만 아니라 시 '와사등'과 '등'에서도 '차단한'이라는 특유의 표현을 썼습니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 김광균 시 '와사등' 중에서
차단-한 내 꿈 우에
- 김광균 시 '등' 중에서
시 '설야'로 다시 옵니다.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눈이 '차단한 의상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는 흐릿하고 아득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가득한 것만 같습니다.
'흰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그렇게 흐릿하고 아득한 그리움과 외로움이라는 의상을 입은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밤이네요.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이 구절에서 차가움 위에 뜨거움이 번갈아 자꾸 놓이는 듯한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하염없이 내려 쌓이는 싸늘한 흰눈의 갈피 속에 뜨거운 '내 슬픔'이 '고이 서리는' 눈오는 밤 '설야'입니다.
하염없이 내려 쌓이는 눈에 '내 슬픔' 고이 씻겨졌기를,
그렇게 '내 슬픔'은 눈처럼 하얗게 정화되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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