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읽고 쓰고 스미기

조지훈 시 승무

by 빗방울이네 2024. 1. 10.
반응형

조지훈 시인님의 시 '승무'를 만납니다. 간절한 몸짓의 승무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다가오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조지훈 시 '승무' 읽기

 
승무(僧舞)
 
- 조지훈(1920~1968, 경북 영양)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 머리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이냥 하고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 시선」(조지훈 지음, 오형엽 해설,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중에서
 

2.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우리의 시문학사에서 빛나는 시 '승무(僧舞)'는 조지훈 시인님의 데뷔작입니다. 조지훈 시인님은 정지용 시인님의 추천으로 등단했는데, 이 시는 1939년 12월 「문장」에 실린 추천작입니다. 시인님 20세 때네요. 
 
국어사전에 시 '승무(僧舞)'의 정의가 등재되어 있네요. '승무를 추고 있는 여승을 소재로 하여 삶의 번뇌를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회화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설명합니다.
 
시 '승무'는 우아하고 섬세한 우리말을 음미할 수 있어 좋습니다. '나빌레라', '파르라니', '감추오고', '정작으로', '외씨보선', '살포시', '모두오고', '이 밤사' 같은 우리 말맛이 살아있는 시입니다. 
 
이 시는 연마다 다른 선율을 느낄 수 있는 점도 특별합니다. 승무를 추고 있는 사람의 움직임을 시 구절 속에서 생생히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을 가슴에 안고 시 '승무'를 만납니다.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시의 카메라는 첫 장면으로 '하이얀 고깔'을 비추면서 춤을 추려는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네요. 고깔을 쓴 사람의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紗(사)'는 비단을 말합니다. 춤추는 이가 머리에 쓴 것은 얇은 비단으로 된 '하이얀 고깔'입니다.
 
'나빌레라'는 '나비 같다' '나비일려나' '나비일리라'의 의미로 새깁니다. 그 고깔이 나비 같다는 말인데요, 춤추는 이가 금방이라도 나비처럼 날아갈 듯 몸을 움츠리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 / 박사(薄紗) 고깔에 감추오고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파르라니'는 '파란빛이 돌도록'이라는 뜻입니다. 삭발한 머리가 파르스름한데 그 얇은 비단(薄紗) 고깔로 감추었다고 합니다.
 
'감추오고'는 '감추고'보다 단아하고 간절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우리의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게 하네요.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이 3연에서 시의 카메라는 춤추는 이를 바짝 클로즈업합니다. 아, 여승이구나. '두 볼'과 '고와서'에서 우리는 춤추는 이가 여승이라는 점을 처음 인식하면서 저마다 시에 바짝 다가갑니다. 
 
'정작으로'는 '정말로' '진짜로' '참으로'의 의미로 새깁니다.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참으로 고와서 서럽다고 합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를 박사 고깔에 감춘 여승입니다. 저렇게 고운 이가 어떤 사연으로 세속의 연을 끊었을까 생각하니 애처롭고 서럽게도 느껴집니다. 
 
빈 대(臺)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에 / 오동잎 잎새마다 달이 지는데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앞의 3연에서 춤추는 이를 클로즈업했던 카메라는 이제 줌아웃으로 주위를 비추어줍니다. 춤추는 무대가 드러났네요. 법당 앞뜰일까요? 춤추는 이는 비어 있는 대() 위에 있고 이 무대의 조명은 황촉불(밀랍으로 만든 초)입니다. 그 무대와 주위를 달이 환하게 비추고 있고요, 달빛 묻은 오동잎이 떨어지고 있다('달이 지는데')고 합니다.
 
아무도 없는 가을 달밤의 뜨락입니다. 이 춤은 대중에게 보이는 춤이 아니라 자신만의 춤이네요. 두 볼이 서러울 정도로 고운 여승이 아무도 없는 달밤의 뜨락에서 고깔을 쓰고 추는 춤은 세속의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짓이네요.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이 접어 올린 외씨보선이여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드디어 춤추는 이가 움직입니다. 장삼을 허공에 뿌렸네요. 내면의 고뇌를 허공에 뿌리듯이요.
 
여승은 기다란 소매 자락을 허공에 뿌리며 날렵하고 경쾌하게 '돌아설 듯' 날았습니다. 그 큰 율동 탓에 그동안 옷자락에 덮여 보일 듯 말 듯 하던 '외씨보선'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카메라 앵글은 '외씨보선'을 클로즈업합니다. '외씨보선'은 외씨버선의 방언, '외씨'는 오이씨를 말합니다. 오이씨처럼 볼이 볼록하고 갸름하여 맵시가 있는 버선이네요. 
 
북채를 쥔 손끝에서 '외씨보선'의 발끝까지 섬세한 춤사위가 내면의 한과 번뇌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태평소 가락이 유장하게 휘날릴 것만 같습니다.
 

"나빌레라"-조지훈시'승무'중에서.
"나빌레라"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3.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는 별빛이라'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도우고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돌아설 듯 날아가던 여승의 춤사위가 일순 멎었습니다. 카메라는 '외씨보선'을 벗어나 밤하늘을 응시하는 그이의 '까만 눈동자'를 가까이 보여줍니다.
 
우리는 그 눈빛을 볼 수 없지만 어떤 간절한 염원을 담은 눈빛일 것만 같습니다. '모도우고'에서 우리는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눈빛을 '모도우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여승의 눈빛을 다 느낄 수 있으니까요. 
 
'모도다'는 '모으다'의 방언입니다. '모도고'보다 '모도우고'가 단아하고도 간절한 느낌이 더하네요. 앞 2연의 '감추오고'처럼요.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이야 / 세사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시의 카메라에 비친 '까만 눈동자'가 점점 젖어들기 시작합니다.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까만 눈동자'를 모으고 응시하던 여승의 '복사꽃 고운 뺨'에 눈물이 아롱질 듯합니다. 
 
세상일(세사)에 시달려도 이 세속의 번뇌는 별빛이라 합니다. 희로애락에 집착하지 않고 정진하여 번뇌를 떨쳐내면 그 자리에 별빛/깨달음이 찾아오겠지요?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이냥 하고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다시 춤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조금 전 5연에서 고조된 가락과는 달리 이 8연에서 분위기가 바뀝니다. ‘거룩한 합장’. 그래서 이 구절에서는 춤사위가 느리게 진행됨을 알 수 있습니다. ‘휘여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 간절함이 느껴집니다. 세속의 번뇌를 떨쳐내려는 몸짓요.

이 밤사 귀또리도 지새는 삼경(三更)인데 /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


‘밤사’, ‘사’는 '야' '이야'의 경상도 방언입니다. ‘삼경’은 하룻밤을 오경으로 나눈 셋째 부분으로 열한 시에서 새벽 한 시 사이, 한밤중입니다.

아무도 없고 달빛이 교교히 빛나는 뜰에서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고깔을 쓰고 춤추는 여승이 있습니다. 세속의 번뇌를 초극하고 별의 영원성, 우주의 마음에 닿고자 간절한 몸짓으로 춤추는 여승이 있습니다.

귀뚜라미가 울어대는 한밤입니다. 시각적 이미지로 일관해오던 이 시에서 처음 청각적 요소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귀뚜라미 울음은 그 공간의 적막감을, 그 여승의 간절함을 두드러지게 하고 증폭시키고 있네요.
 
이 승무 한 자락을 시늉이라도 하면서 '돌아설 듯 날아가며' 이런저런 세상사 허공에 흩어버리고 싶은 밤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조지훈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조지훈 시 완화삼 읽기

조지훈 시인님의 시 '완화삼'을 읽습니다. 완화삼은 무슨 뜻일까요? 이 시는 과연 무얼 말하고 있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며 독서 목욕을 하십시다. 1. 조지훈 시 '완화삼' 읽기 완화삼(玩

interestingtopicofconversation.tistory.com

반응형

'읽고 쓰고 스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곽재구 시 사평역에서  (111) 2024.01.12
국선도 오공법 의세  (115) 2024.01.11
이주홍 소년소설 이순신 장군  (112) 2024.01.09
윤동주 시 또 다른 고향  (99) 2024.01.08
유영석 겨울 바다  (100) 2024.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