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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황동규 시 한밤으로

by 빗방울이네 2024.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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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님의 시 '한밤으로'를 만납니다. 청춘의 열병(熱病)이 느껴지는 시, 춥고 배고픈 청춘을 안아주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동규 시 '한밤으로' 읽기


한밤으로

황동규(1938년~ , 서울)

우리 헤어질 땐
서로 가는 곳을 말하지 말자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그것을 노래부를 힘만을
 
눈이 왔다, 열한시
펑펑 눈이 왔다, 열한 시
 
창(窓) 밖에는 상록수(常綠樹)들 눈에 덮이고
무엇보다도 희고 아름다운 밤
거기에 내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눈이 왔다, 열두 시
눈이 왔다, 가버리지 않었다, 열두 시
 
너의 일생(一生)에 이처럼 조용한 헤어짐이 있었나 보라
자물쇠 소리를 내지 말어라
열어두자 이처럼 고요한 곳에 우리의 헤어짐을
 
한시
 
어디 청춘(靑春)을 다 낭비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자(者)가 있으리오
어디 이 청춘(靑春)의 한 거리를 바삐 달릴 만큼 가난한 자(者) 있으리오
조용하다 지금 모든 것은
 
두시 두시
 
말해보라 무엇인가 네 골돌히 바래 온 것을
밤 새 오는 눈, 그것을 맞는 길
그리고 등(燈)을 잡고 섰는 나
말해보라 마음속의 마음 속의 너의 말을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
가만히 떠나갈 뿐이리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나에게는 그것을 노래 부를 힘만을.
 
▷황동규 시집 「어떤 개인 날」(중앙문화사, 1961년) 중에서. 


2. 청년 황동규의 열정 가득한 첫 시집을 만나다

 
황동규 시인님은 20세 때인 1958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고 23세 때인 1961년 첫 시집 「어떤 개인 날」을 펴냈습니다.
 
그 시집의 첫 시로 '한밤으로'가 맨 앞에 전진 배치되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귀중본으로 보관 중인 이 오래된 시집을 빌려봅니다.
 
시집 판권에 보니 500부 한정판이었네요. 발행처는 중앙문화사, 가격은 1,000 환이었네요.
 
'국민 연애시'로 꼽히는 '즐거운 편지', 그리고 10월이 되면 모두 이끌리는 시 '시월(十月)'도 이 시집에 있어 반갑네요.
 
우리가 너무나 사랑해마지 않는 이 시들이, 낡아서 바스러질 것만 같은 누른 시집의 갈피 속에서 뜨겁게 숨 쉬고 있었네요.
 
이 시집의 맨 마지막에 '후기'로 시인님의 글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시집을 하나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이 있어
몇 번인가 모았다 버렸다 했다.
▷황동규 첫 시집 「어떤 개인 날」 후기 중에서
 
63년 전이네요. 오늘날 한국의 대표시인이 된 황동규 시인님이 첫 시집을 낼 때는 이처럼 조심스러웠네요. 살얼음 위를 걷듯 말입니다.
 
첫시집을 내면서 시인님은 자신의 시를 어떻게 소개했을까요?
 
내가 나와 닮은 슬픔과 기쁨을 가진 사람들에게 바친 눈물의 흔적이며,
내가 스스로 언어의 한계에 뛰어든 적막이며,
쓸쓸하나마 어쩔 수 없는 나의 바라봄 ···
▷위의 같은 책 중에서
 
시인님, 빗방울이네도 시인님이 건네주신 '눈물의 흔적' 참 많이 받았답니다.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한지!
 
그러면서 시인님은 첫시집 '후기'를 이렇게 마무리했네요.
 
좀 부족할는지도 모르나 자기 자신들의 품위를 얻을 그 시간을 가지는 데
혹시 도움 줄 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뜻에서
나는 이 시집을 내놓는다.
▷위의 같은 책 중에서
 
참으로 겸손한 청년 황동규 시인님이네요. 한편으론 '청춘의 패기'가 왕창 느껴지는 문장이기도 하고요.
 
그런데요, 청춘에게 이런 열정/용기 아니라면 무슨 재미겠는지요!
 
시 '한밤으로' 함께 들어가 볼까요?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 황동규 시 '한밤으로' 중에서.

 

 

 

3. '거기에 내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1961년에 나온 시집에 실린 시, 그러니까 이 시 '한밤으로'는 황동규 시인님 23세 이전에 써진 시입니다. 
 
독자들에게 자신의 시 세계를 펼쳐 보이는 첫 시집 첫시, 시인님이 매우 고민해서 배치한 시일 것입니다.
 
첫 연부터 만납니다.
 
"우리 헤어질 땐 / 서로 가는 곳을 말하지 말자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 나에게는 그것을 노래 부를 힘만을"
 
이별이 시간이네요. '너'는 누구일까요? 애인일 수도 있겠지만 친구이기도 하고, 어려운 시대를 힘겹게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 속의 시간은 전쟁과 전쟁 후의 황폐화된 암울한 시간이겠지만, 그런 암울은 지금도 청춘의 도처에 출몰하고 있겠네요.
 
그렇게 힘든 시간 속에서 정든 사람과 이별하는 일은 얼마나 참기 힘든 일이겠는지요?
 
그러나 시의 화자는 1연에서 이별의 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로 가는 '힘'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눈이 왔다, 열한 시 / 펑펑 눈이 왔다, 열한 시"
 
펑펑 눈이 오고 있는 이 겨울밤의 구절에서 뜨거운 청춘의 심장이 힘차게 박동하는 것만 같네요.
 
하얀 눈이 상심한 청춘을 덮어주는 따스함, 그리고 반복된 '열한 시'라는 구절에서 청춘의 뒤를 쫓아오는 시간의 긴박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창(窓) 밖에는 상록수(常綠樹)들 눈에 덮이고 / 무엇보다도 희고 아름다운 밤 
거기에 내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거기에 내 검은 머리를 들이밀리'. 이 구절이 시의 우듬지이네요. 제목 '한밤으로'와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희고 아름다운' '한밤으로' 청춘의 '검은 머리를' 들이밀겠다고 합니다.
 
이별의 상심이야 시간이 치유하겠지, 나는 저 '희고 아름다운' 쪽을 향할 것이다!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지향할 것이다. 
 
이런 시인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네요. 
 
그런데 이 구절을 읽자마다 최근 시집의 사진에서 본 시인님의 머리가 떠오르네요. 희고 듬성듬성해진 머리 말입니다.
 
오, 원로시인님의 푸릇했던 청춘의 첫 시를 읽는 이 즐거움과 서러움을 어찌해야 할까요? 

"눈이 왔다, 열두 시 / 눈이 왔다, 가버리지 않었다, 열두 시"
 
시 '한밤으로'는 「황동규 시전집 1」(문학과지성사, 1998)에 실리면서 크게 수정됩니다.
 
500부 한정판의 첫 시집의 시는 잊혔겠지만, 변화된 시 구절 속에 시인님의 체온이 스며 있겠지요?
 
이 4연 속의 '가버리지 않었다'는 나중에 '모든 소리들 입다물었다'로 바뀌었네요.
 
'가버리지 않었다'가 시인님은 마음에 차지 않았나 보네요.
 
이 구절을 '모든 소리들 입다물었다'로 고친 걸 보니 이별 뒤의 하얀 겨울밤의 고요를 더 강조하고 싶었던가 봅니다.
 
"너의 일생(一生)에 이처럼 조용한 헤어짐이 있었나 보라 
자물쇠 소리를 내지 말어라 / 열어두자 이처럼 고요한 곳에 우리의 헤어짐을"
 
이 5연 속에서도 약간의 수정이 일어납니다. '조용한'이 '고요한'으로, '이처럼 고요한 곳에'는 '이 고요 속에'로 바뀝니다.
 
큰 차이가 없어 보이는 이 작은 수정, 그러나 그 미세한 뉘앙스의 차이는 시인님에겐 정말 소중한, 애끓는 일이었을 겁니다.
 
'너의 일생에 이처럼 조용한 헤어짐이 있었나 보라'. '헤어짐'은 얼마나 피가 끓는 사건인지요? 그러나 '조용한 헤어짐'이라고 하네요. 그만큼 화자는 이제 그런 이별을 관조할 수 있게 되었겠지요?
 
'열어두자 이처럼 고요한 곳에 우리의 헤어짐을'. 이런 고요 속에서라면 자신의 심연이 보이겠지요? 아무런 방해 없이 자신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는 시간입니다. 얼마나 외롭고 또 뜨거운 시간인지요?
 
"한시"
 
2연에서 '열한 시', 4연에서 '열두 시', 6연에서 '한시'를 아예 한 개의 연으로 독립시켜 두었네요.
 
이 외따로이 배치된 '한시'라는 구절이 고요함을 한층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어디 청춘(靑春)을 다 낭비할 수 있을 만큼 부유한 자(者)가 있으리오
어디 이 청춘(靑春)의 한 거리를 바삐 달릴 만큼 가난한 자(者) 있으리오
조용하다 지금 모든 것은"
 
이 7연에서도 대폭적인 수정이 일어납니다. 
 
'청춘(靑春)을 다 낭비할 수 있을 만큼'이란 구절이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길 가는 청춘을 낭비할 만큼'으로 바뀝니다.
 
그만큼 이 구절에서 청춘의 소중함을, 간절함을 담고 싶었나 봅니다.
 
'한 거리를 바삐 달릴 만큼'은 나중에 '한 모퉁이를 종종걸음칠 만큼'으로 고쳐집니다.
 
반복되는 '어디~있으리오'라는 구절에서 춥고 가난한 시간을 건너가는 청춘의 몸부림이 느껴지네요. 
 
그렇지만 돌아보면, 고뇌와 방황이란 모름지기 청춘의 엔진 아니던가요!
 
"두시 두시"
 
8연은 '두시 두시' 단 네 글자네요. 열한 시에서 시작된, 눈 오는 겨울밤 청춘의 하얀 고뇌가 새벽 두 시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두시 두시'를 반복해서 읽어보니 두근거리는 가슴, 힘차게 약동하는 청년 황동규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미래, 그렇지만 늘 깨어 있고자 하는 청춘의 정열이 풀무질하는 숨소리겠지요?
 
"말해보라 무엇인가 네 골돌히 바래 온 것을 / 밤 새 오는 눈, 그것을 맞는 길
그리고 등(燈)을 잡고 섰는 나 / 말해보라 마음 속의 마음 속의 너의 말을"
 
이 9연에도 나중에 많은 변화가 왔네요.
 
'무엇인가 네 골돌히 바래 온 것을'라는 구절은 '무엇인가 무엇인가 되고 싶은 너를'로 변화됩니다.
 
수정 후가 좀 더 간절해진 분위기입니다. 좀 더 구체화된 느낌이고요.
 
'마음 속의 마음 속의 너의 말을'이라는 구절에도 변화가 일어나 '무엇인가 새로 되고 싶은 너를'로 바뀌었네요.
 
'마음 속의 너의 말'이 좀 더 구체화된 느낌입니다.
 
'새로 되고 싶은 너'를 발견하네요. 이별의 시간은 이렇게 삶의 자양분이 되는 시간이기도 하겠지요? 청춘에게라면 더욱 말입니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 / 가만히 떠나갈 뿐이리 
너에게는 나를 떠나버릴 힘만을 / 나에게는 그것을 노래 부를 힘만을"
 
이 마지막 연에서는 대규모의 수정이 일어납니다.
 
앞의 2개 행이 새로운 3개의 행으로 대체됩니다.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리 / 가만히 떠나갈 뿐이리'. 이 2행이 아래의 3행으로 바뀝니다. 이렇게요.
 
"이 헤어짐이 우리를 저 다른 바깥
저 단단한 떠남으로 만들지 않겠는가
단단함, 마음 끊어 끌어낸 ···"
 
마지막 연은 처음과는 완전히 다르게 변모했네요.
 
이별에 대한 소극적 관조의 태도에서 새로운 깨우침으로, 이별을 대하는 화자의 자세가 적극적으로 변화한 느낌입니다.
 
'헤어짐'은 막막하고 아픈 일이지만 그와 동시에 화자는 자신이 더욱 단단해지는 시간으로 받아들였네요.
 
춥고 배고팠던 청춘은 고통의 시간 속에서 이렇게 뜨거운 '노래'를 불렀네요.
 
'나에게는 그것을 노래 부를 힘만을'
 
청춘의 어느 춥고 배고픈 겨울을 이렇게 노래 부르는 뜨거움으로, 단단함으로 건너왔네요. 
 
앞이 보이지 않았던 캄캄한 '한밤으로' '검은 머리'를 들이밀며 씩씩하게 말입니다. 
 
그랬으니 보약 같은 시들을, 늘 흔들리고 쓰리던 시간을 달래주던 수많은 시들을 우리에게 선사해 주셨겠지요?
 
나중에 이렇게 시를 다듬은 걸 보면, 시인님은 첫 시집 첫시 '한밤으로'를 무척이나 애지중지하셨나 봅니다. 
 
시인님은 생인손 같은 첫시집 첫 시를 고치고 매만지면서 아득한 기억 속의 청춘의 시간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겠지요?
 
우리 모두 청춘의 시간을 쓰담쓰담해 보는 애틋한 한밤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황동규 시 풍장 1

황동규 시인님의 시 '풍장 1'을 만납니다. 죽음을 직시하고 이해하며 삶의 의미를 헤아리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황동규 시 '풍장 1' 읽기 풍장 1 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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