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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소월 먼 후일

by 빗방울이네 202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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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월 시인님의 시 '먼 후일'을 만납니다. 가정법과 반어법 속에 애절한 그리움을 숨겨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소월 시 '먼 후일' 읽기

 
먼 후일(後日)
 
김소월(본명 김정식, 1902~1934, 평북 구성)
 
먼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래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래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소월 시집 「진달래꽃」(김정식 지음, 숭문사 발행, 1950년) 중에서.
 

2. 슬픈 가정법, 그리고 더 슬픈 반어법의 시 '먼 후일'

 
시집 「진달래꽃」은 김소월 시인님이 생전에 발간된 유일한 시집입니다.
 
이 시집은 1925년에 매문사(買文社)에서 발행됐습니다.
 
이어 1950년에 숭문사(崇文社)에서 나온 시집 「진달래꽃」도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두 시집을 찾아 비교해 봅니다.
 
1925년의 「진달래꽃」을 현대어로 고쳐 다시 낸 것이 1950년 나온 「진달래꽃」이네요.
 
1925년에 나온 시집에 실린 시 '먼 후일'을 아래에서 옛체 그대로 만나봅니다.
 
참고로, 시 속의 'ㄸ'은 'ㅅㄷ'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띄어쓰기만 조정했습니다.
 
먼 後日
 
먼훗날 당신이 차즈시면
그때에 내말이 「니젓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무쳑 그리다가 니젓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밋기지 안아서 니젓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닛고
먼훗날 그때에 「니젓노라」
 
「진달래꽃」(김정식 지음, 매문사 발행, 1925년) 중에서(초간 희귀 한국현대시 원본전집 20, 문학사상사 자료조사연구실 발간).
 
옛체 그대로 보니 시인님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네요. 
 
'차즈시면'은 '찾으시면'보다 더 발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애절함으로 찾아온 느낌이랄까요?
 
'나무리면' 속의 나무람 앞에서는 '나무래면' 속의 나무람 앞에서보다 더 입이 삐죽 나왔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니젓노라'는 '잊었노라'보다 잊지 못해 더 된통 토라진 모습이랄까요?
 
예스러운 말이 이렇게 정답게 다가오네요.
 
한 구절씩 음미해 봅니다. 1 연입니다.
 
'먼훗날 당신이 차즈시면 / 그때에 내말이 「니젓노라」'
 
'먼훗날 당신이 차즈시면(찾으시면)'. 이 첫행에 이 시로 다가가는 단서가 숨어있네요.
 
먼훗날 당신이 나에게 찾아오길 바라는 나의 애틋한 마음 말입니다.
 
헤어진 당신이 나에게 잊힌 당신이라면 '먼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같은 슬픈 가정법의 노래를 하고 있을까요?
 
이 구절에는 당신이 먼 훗날에라도 나를 찾아오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니젓노라(잊었노라)'. 그래서 이 말투에서는 냉정함과 원망이 느껴집니다. 
 
아주 남이 되어버린 이에게 하는 말처럼 다가오네요. 그렇다고 정말 그럴까요?
 
왜 여태 오지 않고 있느냐는 한(恨) 이 느껴집니다.
 
지금 찾아와도 소용없어! 난 다 잊었어! 말은 이렇게 하면서 속은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고 있네요.
 
이 구절에서 우리는 이 시가 반어법으로 애타는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는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연에서 나는 또 어떤 그리움의 청승을 떨고 있을까요?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 「무쳑 그리다가 니젓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나무라면)'. ‘속으로’는 ‘마음으로’ ‘마음 속에 있는 말로’의 뜻으로 새깁니다. ’정말로‘에 가깝겠네요.

'나무리면(나무라면)'. 앞에서 '잊었노라'라고 한 나의 선언에 대한 님의 반응입니다. 그리 사랑해 놓고 잊었다고? 이렇게 님이 나무라면,라고 가정하고 있네요. 이 또한 참으로 슬픈 가정법입니다.
 
'무쳑(무척) 그리다가 니젓노라(잊었노라)'. 아니, 1연에서는 '잊었노라'라고 단언해 놓고서는 님이 나무란다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라고 말한다네요. 도대체 이 '나'의 마음 갈피를 알 수 없는 구절입니다. 왜 이렇까요?
 
그건 '나무리면(나무라면)'에 단서가 있습니다. 나무란다는 것은 님이 나의 사랑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니 나도 한풀 누그러져서 '무척 그리다가'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겠네요.
 
그러나 아직 나에 대한 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님을 사랑하고 있지만, 님에게 토라진 듯 보이게 '잊었노라'라는 속없는 선언이 이어지네요.  
 
3연으로 갑니다.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 「밋기지 안아서 니젓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나무라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토록 무척이나 나를 그리워했다면 어찌 잊을 수 있나요? 이렇게 님이 나무란다는 말이네요.
 
이 구절은 님이 나에게 계속 나무라주기를 바라는 나의 심리상황이 보이네요. 이 또한 얼마나 슬픈 가정법인지요? 한 번만 더 나무라주면 사랑한다고, 당신에게 나의 속마음을 말할 수 있을 텐데,라고 생각했을 것만 같네요.
 
'밋기지(믿기지) 안아서(않아서) 니젓노라(잊었노라)'. 무엇이 믿기지 않았을까요? 헤어진 님이 나에게 기다려달라고 한 말이었을까요? 헤어진 상황 자체였을까요? 사랑하는 나를 버리고 간 님의 심성이었을까요?
 
여기서는 그토록 사랑하다가 헤어지게 된 상황으로 새겨봅니다. 이별이라니, 그건 꿈이야, 현실이 아니야.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별, 잊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이별이네요.
 
'잊었노라'라고 그렇게 허언을 일삼던 나는 4연에서 어떻게 될까요?
 
'오늘도 어제도 아니닛고 / 먼훗날 그때에 「니젓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닛고(아니잊고)'. 맙소사, 여기서 그만 나의 본심이 드러나고 말았네요.
 
1,2,3연에서 '잊었노라' 냉담한 척 그토록 호언장담하더니 '오늘도 어제도 아니잊고'라고 합니다.
 
사실은요, 저는 당신을 내내 잊지 않고 있었답니다, 오늘도 어제도요. 
 
'먼훗날 그때에 니젓노라(잊었노라)'. 시의 제목이기도 한 이 '먼훗날'은 1연 1행('먼훗날 당신이 찾으시면')에서 보듯 당신이 나를 찾아오는 미래의 어느 먼 훗날입니다. 당신이 나를 찾아오시면 그때 나는 '잊었노라'라고 말하겠다고 하네요.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었는데 먼 훗날이라고 잊힐리가요!
 
먼 훗날 당신이 오면 당신을 앞에 두고 나는 이런다고 하네요. '잊었노라'
 
이때의 '잊었노라'에는 눈물이 한 바가지 들어있는 '잊었노라'이겠지요? 
 
이때의 '잊었노라'에는 왜 이제야 오시나이까!라는 원망 반 반가움 반이 버무려진 '잊었노라'이겠지요?
 
그러니 먼 훗날 나를 찾아온 당신을 향해 내가 '잊었노라'라고 한다고 해서 당신이 어떻게 그것을 진짜 '잊었노라'로 받아들이겠는지요? 
 
당신이 나를 당신의 따뜻한 가슴에 폭 안아주고야 말 '잊었노라'입니다.
 
'잊었노라'. 만천하에 공언하는 듯한 이 말속에는 사랑하는 당신을 향한 얼마나 애절한 그리움이 스며 있는지요! 
 

"니젓노라" - 김소월 시 '먼 후일' 중에서.

 

 

 

3. 시 '먼 후일'은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의 첫 시

 
이 '먼 후일'은 언제 적 시일까요?
 
「김소월전집」(김용직 편저, 서울대학교출판부)에서 시인님의 연보를 펼쳐봅니다.
 
이에 따르면, 1920년(19세) 「창조」에 '낭인(浪人)의 봄'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고, 그해 「학생계」 7호에 '먼 후일' 등 시 3편을 발표합니다. 
 
그러니까 시 '먼 후일'은 시인님 19세에 등단한 해에 발표된 초기 시입니다.
 
시집 「진달래꽃」(1925년)은 127편의 시가 실린, 시집으로는 두꺼운 분량의 시집입니다. 시집을 펼쳐보니 목차만 12페이지에 달하네요. 
 
목차 속에 소제목만 16개입니다.
 
그 소제목은 이렇습니다.
 
'님에게'를 비롯, '봄밤' '두 사람' '무주공산' '한때한때' '반달' '귀뚜라미'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밭이 된다고' '여름의 달밤' '바리운 몸' '고독' '여수' '진달래꽃' '꽃촛불 켜는 밤' '금잔디' '닭은 꼬꾸요'.
 
이 시 '먼 후일'은 시집  「진달래꽃」의 맨 첫 페이지에 실린 첫 시입니다.
 
첫 소제목 '님에게'에는 10편의 시가 배치됐는데, 그 첫 번째 시가 '먼 후일'이네요.
 
시인님은 시집 「진달래꽃」에 실을 127편의 시를 골라놓고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먼 후일'을 대표선수로 내세워볼까? 이 시가 사람들을 시집 속으로 잘 인도해 주겠지?라고요.
 
시인님은 이토록 애절히 반어적으로 '잊었노라'라고 외치는 시를 시집 맨 앞에 전진 배치해 두고 사랑했던 이를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고 있었네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소월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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