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시인님의 시 '편지'를 만납니다.
아침 햇빛보다 맑은 삶에 대해 곰곰 생각하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천상병 시 '편지' 읽기
편지
천상병(1930~1993, 일본 출생 창원 성장)
- 1 -
아버지 어머니, 어려서 간 내 다정한 조카 영준이도, 하늘나무 아래서 평안하시겠지요. 그 새 시인(詩人) 세 분이 그 동네로 갔읍니다. 수소문해 주십시오. 이름은 조지훈(趙芝薰) 김수영(金洙暎) 최계락(崔啓洛)입니다. 만나서 못난 아들의 뜨거운 인사를 대신해 주십시오. 살아서 더없는 덕과 뜻을 저에게 주었읍니다. 그리고 자주 사귀세요. 그 세 분만은 저를 욕하진 않을 겝니다. 내내 안녕하십시오.
- 2 -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고
전세계(全世界)보다
더 복잡했고
어둠보다
더 괴로왔던 사나이들,
그들은
이미 가고 없다.
▷천상병 시집 「새」(1971년 처음 간행된 시집을 도서출판 '답게'가 번각해 1992년 발행) 중에서.
2. 천상병 첫 시집이 '유고(遺稿) 시집' 된 사연
천상병 시인님의 첫 시집은 「새」(조광출판사, 1971년)입니다.
그런데 이 시집은 시인님의 문우(文友)들이 내준 유고(遺稿) 시집입니다.
'유고(遺稿)'는 죽은 사람이 남긴 원고를 말합니다.
천상병 시인님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이 친구 천상병의 시 원고를 모아 낸 시집이 「새」입니다.
시집 하나 못 내고 저 세상으로 갔다고 여겨졌던 친구 천상병을 위한 시집이네요.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결국 그(천상병)는 1971년 고문의 후유증과 지나친 음주와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졌다.
쓰러진 그는 행려병자로 취급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같은 해 유고시집이란 이름으로 시집 「새」가 발간되었는데,
이는 그가 죽은 줄 알았던 문우들이 내 준 것이었다.
▷「천상병 시선」(박승희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년) 중에서.
천상병 시인님의 문우 김구용 시인님이 이 시집에 쓴 발문(跋文)을 잠깐 볼까요?
그대는 범속(凡俗)한 상식으로 따질 수 없는 일화(逸話)를 많이 남긴 주인공이지만,
또 그 장난기로 어디에 숨어서, 나 같은 사람의 하찮은 시름을 가가대소(呵呵大笑)하는가.
그러지 말고 어서 나오게. 무던히도 때(垢)를 타지 않던 마음아.
비범하고도 천진무사(天眞無邪)한 웃음을 다시 친구들에게 활짝 보여 주게나.
▷천상병 시집 「새」 발문 '내 말이 들리는가'(김구용) 중에서
이 발문 속에 친구들이 생각하는 친구 천상병의 인물됨됨이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 무던히도 때를 타지 않던 마음!
- 비범하고도 천진무사한 웃음!
이 두 문장으로 요약되는 삶이라면 어떤 부유하고 화려한 삶보다 더 아름답고 참다운 삶이었을 것만 같습니다.
이처럼 친구 천상병을 상찬(賞讚)하는 발문의 시집이 나온 뒤 천상병 시인님은 살아있는 모습으로 그 친구들 앞에 등장했습니다.
그때 친구들과 시인님은 얼마나 반가웠을까요? 서로 얼굴은 좀 간지러웠겠지만요.
이처럼 친구들이 내준, '살아있는 시인의 유고시집'으로 유명해진 「새」를 펼쳐봅니다.
출간 당시 시집은 '한국 문단이 생긴 이래 초호화판 시집'으로 꼽혔습니다.
지금 빗방울이네가 만져보고 있는 시집 「새」는 초판의 책 모양 그대로 1992년 나온 번각판입니다.
천상병 시인님은 1993년 '귀천' 하셨으니, 1971년 살아생전 자신의 '유고시집'도 보고, 20년 후인 1992년 그 시집을 그대로 번각한 시집까지 보셨네요.
시인님은 이런 정다운 친구들이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친구들도 이런 멋진 친구 천상병을 얼마나 고마워했을까요?
이처럼 특별한 사연의 시집 「새」를 가슴에 안아봅니다.
크기가 보통 시집의 2배 크기(4×6배판)이고, 표지도 두껍고 딱딱한 하드커버입니다.
친구들이 친구 천상병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느껴지는 소중한 시집 「새」입니다.
이 시집에는 모두 59편의 시가 실렸네요.
시집에 실린 시마다 발표된 연월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시의 배열은 발표 연도순입니다.
시의 주인이 돌아가시고(?) 없으니 시의 배치 순서를 발표된 연도순으로 하는 것으로 논의되었나 봅니다.
가장 최근에 발표된 시가 바로 1971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시 '편지'입니다.
그래서 시 '편지'가 시 「새」의 첫 시가 되었네요.
발표된 시로서 시집 맨 끝에 실린 시는 1949년 「죽순(竹筍)」에 발표된 '피리'이고요. 그 뒤에 나머지 미발표작 5편이 배치됐습니다.
시 '편지'는 어떤 시일까요?
3. 아침 햇빛보다 맑은 삶을 생각하게 하는 시
시 '편지'는 41세의 천상병 시인님이 돌아가신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시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어려서 간 내 다정한 조카 영준이도, 하늘나무 아래서 평안하시겠지요.'
'하늘나무'라는 시어(詩語)가 시의 분위기에 편안한 그늘을 드리워 주네요.
우리도 그 '하늘나무 아래서' 편안히 쉬고 계실, 먼저 가신 저마다의 사랑하는 이들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 새 시인(詩人) 세 분이 그 동네로 갔읍니다.'
이 구절에 이르러 우리는 쿡 하는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단단히 뭉쳐있던 마음이 서서히 물러지고 퍼지면서 자유로워지는 것만 같습니다.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동이 이 동네에서 '그 동네'로 가는 마실 같은 거였네요.
삶과 죽음이란 별개로 아득히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네요.
'수소문해 주십시오.'
참말로! 시인님의 이 해맑은 천진성을 어찌해야 할까요?
'이름은 조지훈(趙芝薰) 김수영(金洙暎) 최계락(崔啓洛)입니다.
그 새 돌아가신, 그래서 부모님이 계신 하늘나라 '그 동네'로 가셨다는 시인 세 사람의 이름을 부모님께 알려 드립니다.
'승무'의 시인 조지훈 시인님(1920~1968, 경북 영양)은 지병으로 48세에 '귀천'했습니다.
'풀'의 시인 김수영 시인님(1921~1968, 서울)은 밤 귀갓길 집 근처에서 버스에 치여 47세에 '귀천'했습니다.
'꽃씨'의 시인 최계락 시인님(1930~1970, 경남 진양)은 지병으로 40세에 '귀천'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세 분 모두 너무나 짧은 40대에 생을 마감하셨네요.
시 '편지'가 1971년 씌었으니 그전 3~4년 사이 돌아가신 분 중에서 이 세 분이 시인님에게 각별했나 봅니다.
'만나서 못난 아들의 뜨거운 인사를 대신해 주십시오'
일찍 세상을 뜬 친구들이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이 구절에서 먼저 간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시인님의 뜨거운 가슴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만 같습니다.
'살아서 더없는 덕과 뜻을 저에게 주었습니다'
동시 '꽃씨'를 비롯 시보다 더 높고 맑고 고운 동시를 썼던 최계락 시인님은 천상병 시인님과 1930년생 동갑입니다.
그 당시 부산의 국제신문 문화부장이었던 최계락 시인님은 천상병 시인님의 막걸리값 '전담 은행'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청탁하지도 않은 시 원고를 신문사로 들고 와서는 원고료부터 선불로 달라고 졸랐다고 하고요. 막걸리값 500원! 하면서 말입니다.
조지훈 시인님(1920년생)과 김수영 시인님(1921년생)은 천상병 시인님보다 10년 선배 시인이었네요.
조지훈 시인님은 민족적 정서나 전통, 불교적 선(禪)의 세계를 담은 시를 썼고 한국전쟁 후부터는 정권의 부정부패 및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참여시를 많이 쓴 분입니다.
김수영 시인님은 강한 현실의식과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과 좌절을 담은 시로 한국 참여시의 새로운 지평을 연 시인으로 평가되는 분입니다.
천상병 시인님은 당대에서 함께 호흡한 이들 선배 시인들의 시를 읽으며 그들로부터 '더없는 덕과 뜻'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주 사귀세요'
쿡 하는 웃음이 두 번째로 터지는 곳입니다. 이 구절로 시인님은 새가슴처럼 졸아붙은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활짝 열어주시네요.
'그 세 분만은 저를 욕하진 않을 겝니다.'
이렇게 부모님께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는 벗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그것도 전후사정 다 아실 '하늘나무' 아래의 부모님께 '그 사람은 내 친구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벗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나의 삶과 나의 진실을 잘 알고 있는 벗 말입니다.
누가 뭐래도 나를 욕하지 않고 감싸줄 벗, 누가 뭐래도 내편이 되어줄 벗 말입니다.
그런 벗이 있느냐고 시인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네요.
'내내 안녕하십시오'
쿡 하는 웃음이 세 번째로 터지는 곳입니다.
안방에 계시는 부모님을 뵙고 잠시 먼 길을 떠나는 자식의 인사인 것만 같네요.
여기까지 시인님은 산문시로 부모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그다음 2연에서는 운문체로 앞에 언급한 세 시인에 대해 이렇게 전합니다.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고 / 전세계(全世界)보다 더 복잡했고
어둠보다 더 괴로왔던 사나이들 / 그들은 / 이미 가고 없다.'
이 연에서는 세 친구 없이 남겨진 시인님의 짙은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앞 1연에서 느꼈던, 장난기 가득한 천진난만한 시인님의 어투는 볼 수 없네요.
시인님은 잘 알고 있습니다.
먼저 간 세 친구들의 삶의 진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햇빛도 그냥 햇빛이 아니라 아침 햇빛이네요.
그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다고 하니, 참으로 그 아침 햇빛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맑은 삶이겠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들은 '어둠보다 더 괴로왔던 사나이들'이라고 하네요.
정권의 부정부패와 사회 부조리가 만연하던 시대를 관통하던 시인들의 삶이었으니, 누구보다 현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보고 있던 그들의 가슴은 어떠했겠는지요?
그래서 그들은 '전세계보다 더 복잡'했던 '사나이들'이라고 합니다.
먼저 간 세 시인들을 이렇게 그리워하고 있는 천상병 시인님의 마음을 다시 천천히 떠올려 봅니다.
'아침 햇빛보다 더 맑았고 / 전세계보다 더 복잡했고 / 어둠보다 더 괴로왔던 사나이들'
이런 문장은 고스란히 천상병 시인님의 삶에도 입혀지는 '딱 맞는 옷' 같은 문장이네요.
'그들은 이미 가고 없다'
시인님도 이미 가고 없습니다.
문득 우리 가슴도 텅 비는 것만 같습니다.
'귀천'하신 시인님도 이제 '하늘나무 아래서 평안'하시겠지요?
가족과 동료, 선후배 시인들과 함께 말입니다.
거기서도 막걸리값 500원! 하고 지인들에게 손 내밀고 계실까요? 장난기 가득한 천진난만한 얼굴로 말입니다.
저마다 텅 빈 가슴으로 뜨거움이 뭉근히 차오르는 시 '편지'였습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천상병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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