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 시인님의 시 '남해 금산'에 오릅니다. 금산 정상에서 우리는 어떤 야호를 외치게 될까요? 시인님이 내밀어주는 손을 잡고 금산을 오르며 독서목욕을 하며 마음을 맑혀봅시다.
1. 이성복 시 '남해 금산' 읽기
남해 금산
- 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문학과지성사) 중에서
이성복 시인님은 1952년 경북 상주 출생으로 1977년 25세에 시 '정든 유곽에서'와 '1959년'으로 계간 「문학과지성」 겨울호를 통해 등단했습니다. 1980년 28세에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를 펴낸 것을 비롯, 시집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 등을 발간했습니다. 산문집 「나는 왜 비에 젖은 석류꽃에 대해 아무 말도 못 했는가」 「그대에게 가는 먼 길」 「꽃 핀 나무들의 괴로움」 등이, 시론집 「무한화서」 「불화하는 말들」 등이 있습니다.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대산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 타인의 '돌' 속에 들어가 본 적 있나요?
이성복 시인님의 시 '남해 금산'은 1986년 시인님의 두 번째 시집 「남해 금산」에 실린 시입니다. 시집 속에는 맨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는데 시집 제목으로 쓰인 걸 보면, 시인님에게도 시 '남해 금산'이 소중한 시라는 의미네요.
시집 「남해 금산」의 해설은 문학평론가 김현 님이 맡았네요. 김현 님은 이 시를 어떻게 읽었을까요? 전체 해설 중 시 '남해 금산' 부문을 만나봅니다.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다.
치욕을 당한 누이는 화자의 사랑으로 덥혀져 울면서 떠나간다.
해와 달, 다시 말해 자연이나 세월이 이끌어 준다는 점에서 그 여자의 모습은 설화적이다.
- 이성복 시집 「남해 금산」 해설 중에서(김현 문학평론가)
시가 조금씩 가슴으로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김현 님은 시 속의 '한 여자'를 ‘치욕을 당한 누이’로 읽어냈네요.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이성복 시 '남해 금산' 중에서
'돌 속에 묻혀 있었네'는 고통 속에 있다는 말이겠습니다. ‘한 여자’는 어떤 치욕으로 인해 돌처럼 깜깜하고 답답하고 딱딱한 고통 속에 있네요.
어떤 치욕이었을까요?
이 시를 쓰기 전, 1985년 이성복 시인님은 학회 참석차 광주로 가는 길에 하루 일찍 집을 출발해 금산이 있는 경남 남해읍에 도착합니다. 금산을 보기 위해서요. 시인님은 금산을 어떻게 알게 됐을까요?
"처음 그 산을 알게 된 것은 서정인의 참으로 아름다운 소설집 「강」에서 '산'이라는 단편을 읽고서였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야수 같은 남자에게 몸을 빼앗긴 한 여교사와 함께 남해 금산을 오른다."
- 「이성복 문학앨범」(웅진출판, 1994) 중 이성복 산문 '물과 흙의 혼례, 남해 금산' 부문
서정인 소설가님의 ‘산’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어보니, 남해 '상주'의 '금산'이 ‘항주’의 ‘덕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이 소설 속 여교사는 제자인 자신을 딸처럼 돌봐주던 스승(교감)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합니다. 소설 속 여교사의 비극이 시 '남해 금산'의 '한 여자'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돌 속에 묻힌 '한 여자'의 고통에 대해 가만히 눈을 감고 헤아려보게 되네요. '돌 속'! 단 두 글자인데, 막막하고 막막하여 도무지 말로 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헤매게 되네요.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이성복 시 '남해 금산' 중에서
1행에서는 '한 여자'였는데, 이 2행에서 '그 여자'로 변했네요. 이에 대한 소설가 김훈 님의 해설이 흥미롭습니다.
'한 여자'는 구체적인 고통 속에 처한 여자이지만 어느 여자인지 알 수 없다 ···
'한 여자'를 안을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여자'를 안을 수 있을 뿐이다 ···
'한 여자'는 '돌 속에 묻혀' 있는 여자다.
'한 여자'는 괴로워하는 익명의 존재다.
- 김훈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의 '돌 속의 사랑-남해 금산' 중에서
시 한 편의 의미를 쫓아가는 한 편의 특별한 수필이네요. 시의 속살이 한층 궁금해집니다. 김훈 님은 이 수필에서 "나는 돌 속에 갇힌 '한 여자'가 돌 속을 떠나가는 '그 여자'로 부활하는 과정들을 생각하면서 이성복의 '남해 금산'을 읽었다."라고 밝혔습니다.
1행의 '한 여자'라는 익명성을 벗고, 2행의 개별적 '그 여자'가 되기까지의 매개는 '사랑'입니다. 2행은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사랑의 힘으로 아프게 함께 견디는, 공감과 치유의 과정일까요? 이렇게 타인의 '돌'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언제였던지요.
3. 석공처럼 돌 속의 사랑을 꺼내준 적 있나요?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 이성복 시 '남해 금산' 중에서
앞에 소개된 김현 님의 감상에 기대어 봅니다. 우리는 '치욕을 당한 누이'가 '화자의 사랑으로 덥혀져 울면서'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게 됩니다. 시의 화자는 석공처럼 돌 속의 '한 여자'를 꺼내주었네요. 우리는 '그 여자'의 울음을 통해 저마다의 영혼 속에 엉켜있던 고통이 풀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알게 되어서(!) 얻은 세속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면 괴로움을 모르는 자연과 합일하게 될까요?
이 글을 읽고 블로그 친구 '빛숲'님이 댓글을 달아주었네요. 시의 이 구절에 대해 빛숲님은 그 여자가 우는 것은 내가 우는 것이고 돌 속에서 떠난다는 것은 내 마음 속의 그녀를 놓아버리는 것이라는 감상을 주셨네요. 사랑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니 해와 달, 온 우주만물이 칭찬하듯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듯하다고도 하고요. 감사합니다, 빛숲님.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 이성복 시 '남해 금산' 중에서
마지막 6, 7행에 이르러 우리는 화자 ‘나’의 이별에서 외로움과 함께 쓸쓸한 자유와 해방을 느낍니다. 그 외로움과 자유와 해방은 저마다의 슬프고 애달픈 삶의 비극을 거쳐 비로소 정화되는 카타르시스일까요? ‘푸른 하늘’처럼요, ‘푸른 바닷물’처럼요.
이로써 우리는 시 '남해 금산'의 정상에 다 오른 것 같네요. 손나팔로 야호하고 외치려는 순간, 어디선가 이성복 시인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네요.
시는 전적으로 말의 일렁임, 술렁임, 속삭임이에요.
시는 뭔지 모르는 거예요···
시를 쓰고 나서, 읽고 나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야
밥에 뜸이 들고, 물이 끓는 거예요.
- 이성복 시론 「불화하는 말들」(문학과지성사) 중에서
이성복 시인님은, 시를 읽고 나서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야 한다네요. 그래야 밥에 뜸이 들고 물이 끓는다고요.
그래야 이 ‘남해 금산‘이라는 제목의 시를 말풍선처럼 머리 끝에 달고 끙끙거리며 금산에 올라가고, 일출을 보고, 산 정상의 기암괴석 위에 주저앉아 이 돌 속에 묻힌다는 의미를 곱씹기도 하고, 저마다 감당해야 할 삶의 비극성을 떠올리다가 부랴부랴 산을 내려가게 되는 걸까요? 그런 삶은 조금씩 깊어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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