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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이중표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부처님 맨발의 이유

by 빗방울이네 2025. 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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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속의 문장을 만납니다.

 

낮고 빈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하고 싶어지는 문장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금강경」 문장 읽기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책을 잠시 덮고 책 속의 장면을 떠올리며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어떤 문장이기에 그럴까요?

 

그때 세존께서는 식사 때가 되자 옷을 입고 법복과 발우를 들고

밥을 빌기 위하여 사위대성(舍衛大城)에 들어가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사위대성에서 밥을 빌어 식사를 하시고

탁발(托鉢)에서 돌아와 옷과 발우를 자리에 놓고 발을 씻으신 후에

마련된 자리에 앉아서 결가부좌(結跏趺坐)를 하고,

몸을 곧추세우고, 대면(對面)하고 주의집중을 하셨습니다.

▷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이중표 지음, 민족사, 2017년 2쇄) 중에서.

 

이 문장은 「금강경」이 시작되는 도입부입니다.

 

이 문장을 읽다 보면 참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불교의 대표 경전으로 꼽히는 「금강경」은 왜 이런 장면으로 시작할까? 하고요.

 

부처님(세존)께서 밥을 빌어먹는 장면이 경전의 시작이라니!

 

밥을 빌어 식사를 하고 돌아와 옷과 발우를 자리에 놓는 장면까지 있고요.

 

거기에다 부처님이 발을 씻는 장면마저도 보여주네요.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의 소의경전(근본경전)인 「금강경」입니다.

 

이런 중요한 경전이 왜 이처럼 소소한 컷으로 시작되는 걸까요?

 

2. 부처님은 손수 발우를 챙겨 밥을 구하러 가셨다

 

앞에 소개된 「금강경」 문장은 이 경전의 시작인 제1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의 일부입니다.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의 맨 마지막 글자 '分(분)'은 나눌 '분'인데, 「금강경」은 이런 나눔 32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因由(인유)'는 '유래'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은 법회가 설해진 유래를 소개한 장이라는 말이겠네요.

 

설법을 시작하기 직전 부처님의 거동을 동영상 카메라가 낱낱이 잡고 있는 생생한 영상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이 설법은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1,250명의 큰 비구들 앞에서 행해진 것입니다.

 

원래 산스크리트어로 된 문장이 한문으로 옮겨졌고, 이 한문이 우리말로 옮겨진 것입니다.

 

앞에서 읽은 도입부를 한문으로 함께 만나봅니다.

 

'爾時(이시) 세존(世尊) 食時(식시) 著衣持鉢(착의지발) 入舍衛大城乞食(입사위대성걸식)'

- 그때 세존께서는 식사 때가 되자 옷을 입고 법복과 발우를 들고 밥을 빌기 위하여 사위대성(舍衛大城)에 들어가셨습니다.

 

'爾(이)'는 '너, 이, 그' 같은 뜻을 지녔는데, '이, 지금, 이에'의 뜻인 此(차)와 유사어이네요.

 

그래서 '爾時(이시)'는 '이때, 그때'의 의미가 되네요.

 

'세존(世尊)'은 부처님을 부르는 칭호의 하나입니다.

 

'食時(식시)'는 '밥때'라는 말이네요. 아침식사였을까요?

 

'著衣持鉢(착의지발)'에서 '著(착)'은 '나타날 저, 붙을 착'으로 쓰입니다. 여기서는 옷(衣)과 함께 쓰여 옷을 입다는 뜻으로 쓰였네요.

 

'持鉢(지발)'는 가질 '持(지)'와 바리때 '鉢(발)'입니다. 바리때는 승려의 밥그릇이고요.

 

그러니 '持鉢(지발)'의 뜻은 '밥그릇(발우)을 지니고'라는 뜻인데요, 아, 참으로 부처님은 이렇게 손수 발우를 들고 가셨네요.

 

이 부분에서 우리는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을 수 없네요. 

 

제자들도 많은 부처님인데, 제자들이 부처님 발우는 대신 들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부처님이 직접 자신의 발우를 챙겼다고 묘사했네요.

 

'入舍衛大城乞食(입사위대성걸식)'에서 사위대성은 지명입니다.

 

'乞(걸)'은 '빌다, 구걸하다, 구하다'의 뜻이니 '乞食(걸식)'의 '밥을 구하다'는 뜻이네요.

 

맨 앞의 들 '入(입)'을 붙여 '入舍衛大城乞食(입사위대성걸식)' 읽으면 '밥을 구하러 사위대성에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설법이 행해지는 정사(精舍)에는 1,250명의 큰 비구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지고자(至高者)의 위치에 선 부처님입니다.

 

그런 부처님이 자신의 밥그릇을 자신이 직접 들고 비구들과 함께 밥을 구하러 가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아침밥이었으면 좀 이른 새벽에 나섰겠지요?

 

부처님은 정사에 식당을 두어서 제자들과 함께 밥을 해 먹지 않고 왜 이렇게 탁발하러 나섰을까요?

 

절에 내 것을 쌓아두지 않고 내 것이란 없는 삶, 바로 무소유의 삶입니다. 

 

스님들이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발우와 승복 뿐이었네요.

 

"부처님은_식사_때가_되자_옷을_입고_발우를_들고_밥을_빌기_위해_사위대성으로_들어가셨습니다"-이중표_'니까야로_읽는_금강경'_중에서.
"부처님은 식사 때가 되자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 밥을 빌기 위해 사위대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 이중표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 중에서.

 

 

3. 금강경 첫머리에 부처님 발 씻는 이야기가 등장하는 이유

 

자, 그렇게 부처님이 사위대성이라는 곳에 가서, 그것도 직접 밥그릇(발우)을 챙겨 지니고 '걸식(乞食)'을 했다는 문장으로 금강경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위대성에서 탁발하는 구체적인 장면이 궁금하네요.

 

어떻게 탁발했는지를 보여주는 두 글자가 「금강경」에 나옵니다.

 

'於其城中(어기성중) 次第乞已(차제걸이) 還至本處(환지본처) 飯食訖(반식흘)'

- 그 성 안에서 차례로 밥을 빌어 본처(사위대성)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셨습니다.

 

이 문장에서 '次第(차제)'는 사전에 '순서 있게 구분하여 벌여나가는 관계 또는 그 구분에 따라 각각에게 돌아오는 기회'라고 풀이합니다. 유의어로 '수순, 차례'가 있고요.

 

'乞已(걸이)'의 '乞(걸)'은 '빌다, 구걸하다, 구하다'의 뜻, '已(이)'는 '이미'의 뜻을 나타내므로 '乞已(걸이)'는 '구함을 마쳤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래서 우리는 '次第乞已(차제걸이)'에서 부처님이 집집이 돌아가며 차례로 음식을 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집에서 다 구하면 될 텐데, 왜 집집이 돌아가며 차례로 음식을 구했을까요?

 

그것은 한 집에 많은 양의 음식을 얻는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것일까요?

 

한 집 한 집 방문하시면서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애로사항도 들어주면서 마음을 쓰담쓰담해주시고 그러셨을까요?

 

한 집에서 조금씩 음식을 얻으면서 그 집 사정도 물어보고 위로도 건네고 했을 부처님의 거동이 떠오르는 것만 같은 문장이네요.

 

이제 본격적으로 부처님의 설법이 시작될까요?

 

아직 아닙니다.

 

한 문장이 더 있네요. 이 문장을 이렇게 「금강경」에 새겨둔 걸 보면 무척 중요한 일인가 봅니다.

 

어떤 문장일까요?

 

'收衣鉢(수의발) 洗足已(세족이) 敷座而坐(부좌이좌)'

- 옷과 발우를 자리에 놓고 발을 씻으신 후에 자리를 펴고 앉으셨습니다.

 

아니 뭐 그리 중요한 팩트도 아닌 듯한데, 이처럼 소소한 내용을 경전에 다 기록해 두었느냐고요?

 

어떤 의미인지 들어가 봅니다.

 

'收衣鉢(수의발)'의 '(수)'는 '거두다'의 뜻, '발(鉢)'은 발우입니다. 그러면 옷(衣)과 발우를 챙겼다는 의미겠네요.

 

부처님이 겉에 입은 긴 가사를 벗어 접어서 옆에 두고 발우를 닦아 챙기는 장면이 선연히 떠오르네요.

 

그것도 손수 말입니다.

 

이는 「금강경」에 적혀있는 내용이니, 이것이 바로 평상시 부처님의 일상이었을 것입니다.

 

'洗足已(세족이)'에 이르면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발(足) 씻는 것(洗)을 마쳤다(已)는 말이겠네요. 

 

부처님이 발 씻는 것을 마친 일이 우리의 깨달음 공부와 대체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리 미주알고주알 적어두었을까요?

 

과연 어떤 소중한 뜻이 숨어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이 맨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탁발하러 이 집 저 집 맨발로 다니다 보니 더러워진 발을 거처로 돌아와 씻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은 왜 맨발이었을까요?

 

부처님께서 맨발인 것은, 신발을 구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발이 없어서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함이다.

일곱 집을 차례로 들리시는 것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살피시기 위함이다.

▷ 「니까야로 읽는 금강경」(이중표 지음, 민족사, 2017년 2쇄) 중에서.

 

'맨발로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함'이라는 문장이 우리 가슴을 찌르네요.

 

이 책의 저자인 이중표 교수님(전남대 철학과)은 여기서 '구도자의 밥'이라는 시 같은 산문 한 구절을 덧붙여 두었네요.

 

박노해 시인님의 책 「다른 길」에 나오는 문장이었는데, 그 책을 구해 전문을 읽어봅니다.

 

버마의 아이들은 일생에 한 번, 단기 출가를 한다.

출가 축제인 '신쀼 의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던 아이들은

사원에 들어오는 순간 가사 한 벌, 밥그릇 하나, 빈 몸만 남는다.

이른 아침 맨발의 스님들은 찬 이슬을 밟으며 밥 동냥을 나간다.

일곱 집을 돌아도 밥그릇이 차지 않으면 가만히 돌아와

이렇게 모자란 밥을 씹으며 가난한 민중의 배고픔을 함께 느낀다.

세계 최장기 군부 독재 속에 버마 불교의 고위층들은 타락했어도

이 가난한 절집의 어린 출가승들의 맑은 뱃속에서 울려 나오는

독송(讀誦)은 성성하고, 눈빛은 푸르기만 하다.

▷박노해 사진 에세이 「다른 길」(박노해 지음, 느린 걸음, 2014년 6쇄) 중에서.

 

그랬었네요.

 

부처님은 맨발로 백성들이 사는 마을에 찾아가서 일곱 집을 차례로 다니며 밥을 빌었었네요.

 

때로는 부처님의 발우에 밥이 다 찰 때도, 또 다 차지 않았을 때도 있었겠지요?

 

좋은 음식도 거친 음식도 있었겠지요?

 

그렇게 차례로 일곱 집을 맨발로 다니며 가난한 사람의 처지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을 살피고 그들의 고통을 어루만지며 그 아픔을 함께 했겠지요?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은 한 마디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이렇게 「금강경」 도입부를 읽으니, 중생들과 함께 하며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가르치신 부처님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습니다.

 

많이 가지려 먼저 가지려 좋은 거 가지려 다 쓴 오늘 하루였습니다.

 

「금강경」 구절을 읽고 나니, 낮고 빈 마음으로 사람들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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