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홍 시인님의 동시 '호박꽃'을 만납니다. 호박꽃을 가지고 노는 시골 아이들의 입말이 맛깔스럽게 스며있는 동시입니다. 이 소중하고 소중한 천진난만으로 독서목욕을 하면서 마음을 씻어봅시다.
1. 이주홍 동시 '호박꽃' 읽기
호박꽃
- 이주홍(1906~1987, 경남 합천)
담부랑에 간드랑
호박꼬치 피엿네
어니야 걱거다고
얼는 따다고
개똥벌네 잡어다가
그속에다 너어두고
뱅 - 뱅 - 돌니면서
밤길 가볼네.
호박꼬치 뱅 - 뱅
노란초롱이 뱅 - 뱅
동리 개들 조타고
방방 짓는다
부역 나간 웨아저씨
비단 초롱 안 보앗지.
뱅뱅 돌니면서
마중 나갈네.
- 「이주홍 아동문학전집 - 동시·동요·동극편」(이주홍문학재단, 도구디자인, 2022년) 중에서
아동문학가 향파 이주홍 님(1906~1987)은 1906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987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예술의 여러 영역에서 방대하고도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어린이를 위한 동요, 동화, 동극은 물론 소설, 시, 희곡, 시나리오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많은 작품으로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초창기를 장식했고, 그림과 글씨에도 능하였습니다. 한국불교아동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경상남도문화상, 부산시문화상 등을 받았고, 대표작으로는 「못난 돼지」 「아름다운 고향」 「섬에서 온 아이」 「사랑하는 악마」 「못나도 울엄마」 「톡톡 할아버지」 등이 있습니다.
2. '담부랑에 간드랑 호박꽃이 피었네'
이주홍 시인님의 동시 '호박꽃'을 발표 당시 원본 그대로 감상해봅니다. 이 시에는 된소리의 경우, '꽃'의 'ㄲ'은 'ㅅㄱ'으로, '따'와 '똥'의 'ㄸ'은 'ㅅㄷ'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만 현대어 '꽃', '따', '똥'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동시는 1930년 월간 소년잡지인 「신소년」 7월호에 발표됐습니다. 지금(2023년)으로부터 무려 93년 전의 동시네요.
당시 이주홍 시인님은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던 소년잡지인 「신소년」 편집기자로 활동하며 이 잡지의 표지그림을 그리고 편집 작업도 하고 주옥같은 작품을 지면에 발표했습니다.
이주홍 시인님은 경남 합천 출신인데 동시 '호박꽃'에 경상도 아이들의 입말투 그대로를 과감하게 살려 호박꽃 놀이가 마치 눈앞에서 펼쳐지는 듯 생생한 느낌을 전해주네요. 참말로 귀한 구절들이네요.
담부랑에 간드랑 / 호박꼬치 피엿네
어니야 걱거다고 / 얼는 따다고
- 이주홍 동시 '호박꽃' 중에서
첫 행에서 ‘담부랑’이 ‘간드랑’과 짝궁되니, 우리 마음 낭랑해지네요. 맑고 밝아지네요.
'간드랑'이란 말, 참 정답네요. 작은 물체가 매달려 조금 가볍고 느리게 옆으로 자꾸 흔들리는 동사 '간드랑거리다'의 어근입니다. 호박꽃이 담부랑(담벼락)에 매달려 '간드랑' 흔들리고 있네요. '간드랑'으로 인해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호박꽃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는 이 동시에서 귀한 우리의 방언 하나를 만납니다. 바로 '어니야'입니다.
'어니야'는 '언니야'의 경상도 방언입니다. 발음해보셔요, '어니야' '어니야' '어니야' ···. 자꾸 발음해보니 '어니야'는 '언니야'라는 말보다 더 친밀한 느낌을 준다는 걸 알 수 있겠네요. '형님아'를 '형아야'로 발음할 때의 정다움이랄까요? 갑자기 아이가 된 느낌이랄까요? '어니야'. 이 얼마나 보석같은 호칭인지요? 오늘 옆에 있는 분을 이렇게 불러봅시다. ‘어니야!’
아이는 키가 작아 '담부랑'에 핀 호박꽃을 꺾지 못하네요. 그래서 '어니야'한테 꺾어달라고 조릅니다. 얼른 따달라고요.
'걱어다고'와 '따다고'를 천천히 음미해 보셔요. '꺽어다오'나 '따다오'보다 경상도 시골 아이들의 입말인 '걱어다고' '따다고'에서는 어리광과 칭얼거림이 물씬 풍겨 어쩐지 더 정답게 느껴지네요. 그 언니는 호박꽃을 안 따줄 수 없겠네요.
그런데 호박꽃은 따서 무얼하려고 그럴까요?
개똥벌네 잡어다가 / 그속에다 너어 두고
뱅 - 뱅 - 돌니면서 / 밤길 가볼네
- 이주홍 동시 '호박꽃' 중에서
호박꽃에다 개똥벌레(반딧불이)를 넣었군요! 요즘은 개똥벌레를 보기 어려워졌지만 그 당시에는 얼마나 흔했겠는지요. 꽁무니에서 빛을 내는 개똥벌레입니다. 이 녀석을 샛노란 호박꽃 안에 넣었습니다. 어떨까요? 환하게 빛을 내겠네요. 밤에 그걸 뱅뱅 돌리면서 골목길을 가고 있는 아이가 보이네요. 얼마나 신기할까요? 개똥벌레는 어지러웠겠고요.
3. '동니 개들 좋다고 방방 짓는다'
호박꼬치 뱅 - 뱅 / 노란 초롱이 뱅 - 뱅
동니 개들 조타고 / 방방 짓는다
- 이주홍 동시 '호박꽃' 중에서
그래서 호박꽃은 노란 초롱이 되었네요. 전통혼례할 때 사용되는 초롱입니다. 바람에 꺼지지 말라고 촛불에 비단 같은 헝겊을 둘렀는데, 어두운 밤길을 비추어주는 오늘날의 '후레쉬'네요. 그걸 흉내내어 호박꽃에 개똥벌레를 넣어 '노란 초롱'을 만들었네요.
'방방'은 잇달아 공중으로 뛰는 모양을 나타내는 부사인데, 밤 골목에서 놀고 있던 동네의 아무 강아지가 그 '노란 초롱'이 좋다고 뛰어오르는 동작이 훤히 보이네요. 키 작은 아이는 강아지를 피해 '노란 초롱'을 연방 위로 들어올렸겠지요?
부역 나간 웨아저씨 / 비단 초롱 안 보앗지
뱅뱅 돌니면서 / 마중 나갈네
- 이주홍 동시 '호박꽃' 중에서
'부역'은 국가가 공익사업에 보수없이 국민을 부리는 노역입니다. 요즘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요. 이 동시가 쓰인 때는 일제강점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역으로 고통을 당했겠는지요?
경상도에서는 외숙모를 '웨아지매'라 합니다. 그러니 '웨아저씨'나 '웨아제'는 '웨아지매'의 상대일 테니 외삼촌이네요. 아, 외삼촌!
우리 모두에게 외삼촌은 얼마나 정다운 분인지요. 어머니의 오빠나 동생이니 얼마나 살가운 분인지요. 어머니와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라는 것은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실인지요.
그 정다운 외삼촌이 밤길을 따라 부역을 나갈 때 배웅을 못 했네요. 비단 초롱 들고, '잘 다녀오세요' 하고 인사를 못했네요. 힘든 부역 노동을 하고 계실 외삼촌은 아무 탈없이 잘 계실까요? 그래서 외삼촌이 오면 이 '노란 초롱'을 뱅뱅 돌리면서 마중가겠다고 합니다. 웨아저씨! 제 노랑 초롱 좀 보셔요, 참 예쁘지요? 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이 아이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운 '나'인지요. 호박꽃 초롱을 손에 든, 먼 시간 속의 이 아이를 가슴으로 포근히 안아보는 밤입니다. 아, 이 얼마나 샛노란 그리움인지!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최초의 '디카시'로 꼽히는 이주홍 님의 동시 '현이네 집'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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