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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황동규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by 빗방울이네 2023.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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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시인님의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을 만납니다. 해골, 으스스하네요. 이 시에는 과연 어떤 보석같은 전언이 들어있을까요? 우리 함께 독서목욕탕에서 저마다의 '해골'을 생각하며 으스스 마음을 씻어봅시다.  
 

1. 황동규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읽기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 황동규(1938년~ , 서울)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쉰다섯 여름과 겨울
그 헐렁한 길을
맨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노니
이마를 땅바닥에 찧기도 했노니.
 
공사장에 나가
거칠은 낱말들을 체질해 거르다
찢어진 체가 되기도 했노니,
정신 온통 너덜너덜.
 
그 해골 돌로 두드리면
돌 소리 내고
나무로 두드리면
나무 소리 내는구나.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 황동규 시집 「미시령 큰바람」(문학과지성사, 1993년) 중에서

 

2. 미소 짓는 해골을 만든다니, 성형일까요?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 황동규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중에서

 
시인님, 도대체 이 무슨 말씀인지요? 해골이 미소를 짓다니요. 그 무시무시한 해골이 어떻게요?
 
그것도 알맞게 미소를 짓는다고요? 아니, 그것도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고요? 자신의 해골을 미소 알맞게 짓도록 만든다고요? 그럼 성형을 한다는 겁니까! 요즘 턱도 깎으니 해골 성형도 있긴 하네요. 거참!
 
쉰다섯 여름과 겨울 / 그 헐렁한 길을 / 
맨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노니 / 이마를 땅바닥에 찧기도 했노니

- 황동규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중에서 


시인님이 55세에 쓰신 시네요. 문득 공자님이 논어에서 하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하늘의 명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50세)와  남의 말을 듣기만 해도 이치를 깨달아 이해하게 된다는 '이순(耳順)'의 나이(60세) 말입니다.
 
55세는 그 중간 즈음이네요. 이 때에 이르면 시인님처럼 저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걸까요? 과연 나는 잘 살아왔던가!
 
55세도 여전히 힘든 삶일 테지만 이 55세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던지요. '헐렁한 길'. 맞춤복처럼 나에게 딱 맞는 길을 가고 있는 이 세상 그리 많겠는지요? '맨머리에 눈비 맞으며 헤매다녔노니'를 쓰기 전에 아마 시인님은 '맨땅에 헤딩하며'라고 쓰려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다 결국 '이마를 땅바닥에 찧기도' 했다고 쓰셨네요. 
 
공사장에 나가 / 거칠은 낱말들을 체질해 거르다
찢어진 체가 되기도 했노니 / 정신 온통 너덜너덜

- 황동규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중에서

 
우리는 지금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이라는 시를 읽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는지, 시인님은 그 구체적인 사례 목록을 보여주고 계시네요.
 
'공사장'은 삶의 현장입니다. 시인님은 평생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시를 쓸 때에도 강단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던 중이었겠고요. '공사장 = 대학'이었네요. '거칠은 낱말을 체질'한다고 했으니, '공사장'은 시를 쓰는 행위의 공간이기도 할 것입니다. 
 
비단 강의하고 시 쓰는 일만이 '낱말 체질하기'일까요? 우리는 내남없이 저마다의 '공사장에 나가' '거칠은 낱말들을 체질해' 거르느라 얼마나 위태위태한지요? 매순간 상대에게 상처되는 말 상처되는 행동이 얼마나 많았겠는지요?
 
그러다 '찢어진 체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정신'이 '온통 너덜너덜'해졌다고 합니다. 55세의 시인이 삶을 돌아보고 쓴 보고서인데 참 공감이 가는 대목이네요. 누구라도 그러하지 않겠는지요?
 

황동규시미소알맞게짓고있는해골
황동규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중에서.


 

 

3. 그대의 해골은 지금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요?

 
그 해골 돌로 두드리면 / 돌 소리 내고
나무로 두드리면 / 나무 소리 내는구나

- 황동규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중에서

 
아, 해골이 나왔네요. 앞서 시인님은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을 만들기 위해 해야만 했던 사례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구절들에서는 그런 수천수만 가지 일들을 어떤 '마음 가짐'으로 했는지 알려주시네요. 
 
이 구절에서 땅에 묻혀 있던 ‘해골’의 윤곽이 쓱 드러나네요. 이 '해골'은 해골 소유주의 두뇌활동의 산물, 더 나아가 '삶의 총체적 인상'이었네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시인님이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면글면 했는지 알 수 있네요. 세상의 율동에 맞추어 파도를 헤어가려는 시인님의 삶의 자세가 느껴집니다. 또한 그 속에서 자신의 소리를 잃지 않았다는 암시도 읽을 수 있네요. 세상살이 이리 어렵네요.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 황동규 시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중에서


우리는 이 시의 마지막 행에 도착했습니다. 여기 오기까지 시인님도 삶의 고산준령을 지나왔네요. 그리하여 시인님은 '미소 알맞게 짓고 있는 해골 하나'를 만들었을까요?
 
빗방울이네는 황동규 시인님이 그런 멋진 해골을 만들었다고 믿습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을 때마다, 시인님이 시 행간에 숨겨둔 해학 코드에서는 쿡쿡 웃었고, 쓸쓸함의 언덕에서는 함께 올라 한숨지었습니다. 외로움의 모퉁이에서는 홀로움이라는 기쁨이 버무려진 외로움이었기에 시인님과 함께 환해질 수 있었습니다.    
 
황동규 시인님의 연작시집 「풍장」의 책날개에 시인님 얼굴 사진이 있습니다. 훤하게 드러난 이마 위로 머리카락 제멋대로 헝클어지게 내버려 두고, 입을 다물고 씩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섰네요. 빗방울이네한테 오랫동안 천천히 각인된 '황동규 표 해골'입니다.  
 
이 시는 우리 모두에게 묻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지금 당신의 해골은 어떤 표정인가?, 라고요.

우리는 살면서 상대방에게 수많은 표정을 남기게 됩니다.
 
카페에서 대화할 때 직접 마주 보는 표정만 표정이겠는지요? 통화할 때 목소리에서는 전화기 너머의 표정이 느껴집니다. 카톡 문자에서도 상대방의 표정이 느껴지고요. 우리가 낸 책에도 저자의 표정이 있겠고, 그림을 남겼다면 그 그림에, 음악을 남겼다면 그 음악에 그 사람의 표정이 남아있겠네요. 

그대는 지금 어떤 사람을 떠올리고 있네요. 그대의 머릿속에 떠오른 그 사람의 표정은 어떤가요? 찡그리고 있나요? 미소 짓고 있나요? 
 
누군가 '나'를 떠올렸을 때 '나'는 어떤 표정의 해골일까요? '나'의 해골은 대체적으로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요? 알맞게 미소 짓고 있을까요?
 
오늘부터라도 '알맞게 미소 짓는 해골 하나 만들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알맞게 미소 짓는 해골'을 갖고 계시는 황동규 시인님!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황동규 시인님의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를 만나 보세요.

 

황동규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황동규 시인님의 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를 만납니다. '홀로움'이란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시인님이 '발명'해 우리에게 건네주신 '홀로움'으로 마음을 맑히며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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