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환 시인님의 시 '바위'를 만납니다. 시인님은 바위가 되고 싶다고 하네요. 시인님에게 바위는 어떤 존재일까요? 우리 함께 시 '바위'로 독서목욕을 하며 저마다의 마음을 맑혀봅시다.
1. 유치환 시 '바위' 읽기
바위
- 유치환(1908~1967, 경남 통영)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生命)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 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시선」(배호남 엮음,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년) 중에서
2.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시인님의 시 '바위'는 시인님의 두 번째 시집 「생명의 서」(행문사, 1947년)에 실렸습니다. 시인님 30대 후반의 시입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시 '바위' 중에서
이 시의 가장 높은 솟대입니다. 죽으면 바위가 되겠다는 시인님의 선언이네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한창 혈기왕성하게 삶을 헤쳐가야 할 30대 후반의 시인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일제 강점기의 말기,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던 시간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 참혹한 시간 속에서 몸부림하다 한계에 갇혀버렸을까요. 시인님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바위를 삶의 지고한 가치로 설정했네요.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참으로 처절한 비원(悲願)이네요.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 유치환 시 '바위' 중에서
'애련(哀憐)'은 애처롭고 가엾게 여기는 동정의 감정입니다. '희로(喜怒)'는 기쁨과 노여움이네요. 시인님은 이런 세속의 감정에 초연한 바위를 지향합니다. 얼마나 많은 상처와 절망을 안고 있었겠는지요.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 유치환 시 '바위' 중에서
시인님은 외부세계로부터 주어지는 고통(비와 바람)에 그냥 몸을 맡겨두고 싶다고 하네요. 바위처럼요. 그런 외부의 공격에도 아무 반응 없이 '비정(非情)'하게, 또한 한마디도 하지 않는 '함묵(緘默)'의 자세를 갖겠다 합니다. 그것도 '억년(億年)'이라는 세월 동안 말입니다. 현실의 암울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 드디어 생명(生命)도 망각(忘却)하고
- 유치환 시 '바위' 중에서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이 구절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네요. 바위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바위로부터 시인님이 받은 인상이 그렇다는 말이네요. 그리하여 나도 그 경지로 가고 싶다는 말인데요.
왜 하필 바위일까요?
바위에 대한 시인님의 흥미로운 정의를 소개합니다. 시인님의 단장(斷章; 몇 줄씩짜리 형식의 산문)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바위 -
얼굴은 안으로,
내면을 밖으로 하고 있는 것!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김광회 편저, 지문사, 1984년)의 유치환 시인님 산문 단장 중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얼굴을 밖으로 내려고 하는지요? 부끄럽게 얼룩진 내면은 안쪽에 꽁꽁 숨기고 말입니다. 시인님은 그러나 바위는 그렇지 않다고 하네요. 그 반대라고 합니다. 얼굴은 안으로 하고 내면을 밖으로 하고 있는 것이 바로 바위라고 하네요.
밖으로 다 드러낼 내면이라면 그 내면 얼마나 한점 부끄럽 없이 당당해야겠는지요. 그러려면 얼마나 채찍질하여 닦아야 했겠는지요. 그래서 시인님은 바위가 되려고 했네요. 그리하여 종래에는 절대적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기를 기원했네요.
3. 절대적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하여!
흐르는 구름 / 머언 원뢰(遠雷)
- 유치환 시 '바위' 중에서
바위의 입장이 되어 봅니다. 우리는 지금 바위가 되어 '흐르는 구름'과 '머언 원뢰(遠雷)'를 보렵니다. 원뢰(遠雷)는 멀리서 울리는 뇌성과 번개, 즉 우레를 말합니다.
바위의 입장에서 이들은 하나의 자연현상일 뿐 바위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네요.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든 번개가 치든 무심한 바위는 아무 흔들림이 없네요. 이는 바로 시인님이 지향하는 달관의 지경이겠지요?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시 '바위' 중에서
참으로 결연(決然)한 마음 가짐이네요. 기쁨에도 무심하고 슬픔에도 무심한 바위입니다. 꿈이 있어도 기쁨의 노래를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바위처럼요. 자신의 몸이 부서져도 슬퍼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바위처럼요. 이 얼마나 비장한 채찍질인지요?
시인님의 산문에서 한 구절 더 소개합니다.
마침내 그날 나는 망각의 신이 되리라.
일체 연루를 절했으매 한량없이 광활한 천공(天空)과 끝없는 지평(地平)과 위괴(偉魁)한 암석과 -
그날 가난한 시인의 변함없는 풍모로서 앉아 있는 내가 들고 있는 것은 망각이 쓰인 백지!
아아 일체가 연유 없는 연유를 얻었으매 그때사 휘황히 절로 빛날 나이리라.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고」(김광회 편저, 지문사, 1984년) 중 유치환 시인님의 산문 단장 '망각'
이 문장을 읽으니 고답(高踏)의 지경에 이르기 위한 시인님의 열망이 느껴집니다.
한량없이 넓은 하늘과 끝없는 지평, 으뜸으로 위대한 암석, 즉 대자연과의 연루조차 끊은 자신을 위해 정진한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바위' 같은 시도 나왔겠네요.
깜깜한 현실을 극복하고 보다 높은 곳을 지향하며 나아가려는 시인님의 몸부림을 생각해 보는 깜깜한 시간입니다. 벽 앞에 굴하지 않고 부단히 앞으로 나아간 시인님, 사랑합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유치환 시인님의 시 '그리움'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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