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수 시인님의 동요 '고향의 봄'을 만납니다.
시인님이 15세에 쓴 작품으로, 우리 겨레의 노래가 된 동요입니다.
이 노래에는 어떤 이야기가 스며 있을까요?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이원수 동요 '고향의 봄' 읽기
고향의 봄
- 이원수(1911~1981, 경남 양산읍)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아동문학전집 1 - 고향의 봄」(이원수 지음, 웅진출판, 1987년 7판) 중에서.
2. 15세 소년 문사의 잡지 투고작 '고향의 봄'
이원수 님의 동요 '고향의 봄'을 만납니다.
이 동요는 아이만 부르는 동요가 아니라 어른도 부르는 동요입니다.
남쪽만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북쪽도 부르는 겨레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원수 님이 15세 때 지은 동요라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 동시를 지을 즈음, 소년 이원수는 신문이나 아동잡지의 독자투고란에 동시를 응모하던 소년 문사였네요.
마산공립보통학교 5학년(15세) 때인 1925년 '고향의 봄'을 써서 아동잡지 「어린이」에 투고했고, 1926년(16세) 「어린이」 4월호에 당선돼 실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동요는 우리 동시 문학의 기반을 다지고 길을 연 이원수 님의 등단작품입니다.
1926년 세상에 발표된 이 동요를 보고 홍난파 님이 곡을 붙여 겨레의 노래 '고향의 봄'이 세상을 적시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을까요?
3. 왜 '내가 살던 고향은'이 아니고 '나의 살던 고향은'일까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그런데요, 첫 소절에서 우리는 발목이 잡혀 휘청이게 되네요.
'나의 살던 고향은'
이 첫 소절이 '나의 살던 고향이'가 아니라 '내가 살던 고향은'이 되어야 바른 어법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면서요.
맞네요. 그동안 무심코 불렀는데, 문법이 맞지 않네요.
'나의 좋아하는 영희'가 '내가 좋아하는 영희'가 되어야 하듯이요.
그런데요, 바로 이 '나의'에 이 동요의 매력이 있는 거 같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시적(詩的) 패러독스(paradox)라고 부를 수 있겠네요.
모순에서 발생하는 긴장 말입니다.
이런 긴장으로 인하여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나의 살던 고향은'에 적셔지게 됩니다.
어떤 이는 '나의 고향'에 눈길이 가고, 또 어떤 이는 '살던 고향'에 더 눈길이 가고요.
'나의 살던'이라는 낯선 시작은 알게 모르게 우리 정신의 거문고 줄을 긴장되게 하네요.
'나의'로 인해 시작부터 이 동요는 특별한 아우라를 만들며 우리를 고향으로 다정히 데려가네요.
'꽃 피는 산골' '울긋불긋 꽃대궐'
이 동요를 부르면 누구라도 시인님의 고향이 어떤 고향이기에 이처럼 아름다운 고장일까?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원수 님은 경남 양산읍 북정리에서 태어나 바로 다음 해 창원군 청원면 중동리로 이사했고, 거기서 김해군 하계면 진영리로 이사하기 전까지 10년 가량 살았습니다.
이 작품이 15세 때 쓰인 점을 감안하면, 이 노래에 등장하는 시인님의 고향은 2세부터 11세까지 살았던 창원군 청원면 중동리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요, 이 노래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고전(古典)이 된 것은 시인님 고향 때문만은 아니었겠지요.
그동안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 수만큼의, 헤아릴 수 없는 고향이 등장했다 사라져 갔겠네요.
노래 부르는 이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자신만의 고향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정다운 고향에는 왜 다시는 가지 못하게 되는 걸까요?
고향에 있더라도 왜 우리는 '나의 살던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걸까요?
이것이 '고향'이 지닌 속성일까요?
4. 영원히 갈 수 없기에 더욱 그리운 '나의 살던 고향'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 그 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15세 소년 문사의 감성이 빚어낸 고향입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이런 고향은 이 동요가 탄생한 1926년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그립고, 2024년을 사는 우리도 그립네요.
나의 고향이 실제로 이 동요에 묘사된 모습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이런 고향이 그립습니다.
'고향의 봄'에 구축된 고향은 우리 모두의 고향, 고향의 기준이 되는 전형(典型)이라고 할까요? 고향 '모델' 말입니다.
그런 고향에 우리는 가고 싶습니다.
지금의 회색 콘크리트에서 벗어나 그런 자연 속의 꽃대궐에 가고 싶습니다.
이렇게 '나의 살던 고향'에 가고 싶다는 것은 지금의 시간을 벗어나고 싶다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지금의 시간을 벗어나고 싶은지요?
반복된 일상으로부터, 나를 사방에서 옭아매는 사소하고 커다란 일로부터, 나를 둘러싼 좋은 사람과 미운 사람으로부터 말입니다.
이렇게 언제나 타향에 살고 있는 듯한, 들뜬 부초 같은 우리는 언제나 '나의 옛 고향'으로 가고 싶습니다.
'나의 옛 고향'으로 가서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와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요, 사실은요, 그런 '나의 옛 고향'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네요.
설혹 그런 '나의 옛 고향'에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다시 '나의 옛 고향'을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고향의 봄'을 부르면서 갈 수 없는 저마다의 고향을 떠올리며 막연한 슬픔과 그리움에 젖어 콧등이 시큰해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고향의 봄'으로 콧등이 시큰해지는 그리움 샤워를 하고 나면 우리는 어쩐지 새 힘이 솟지 않던가요?
이렇게 우리는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힘으로 이 시간을 살아내는가 봅니다.
그대의 '나의 살던 고향', 그대가 그리는 유토피아는 어떤 곳인가요?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이원수 님의 동요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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