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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윤동주 시 무서운 시간

by 빗방울이네 2024.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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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님의 시 '무서운 시간'을 만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씻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무서운 시간' 읽기

 
무서운 시간(時間)
 
윤동주(1917~1945, 북간도 명동촌)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잎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呼吸)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나를 부르지 마오.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55년 10주기 증보판 오리지널 디자인, 소와다리, 2002년) 중에서

 

2. 일제 식민지시대 25세 청년에게 다가온 것은? 

 
시 '무서운 시간' 아래에 '一九四一·二·七'이라고 기록되어 있네요.
 
윤동주 시인님이 1941년 2월 7일 이 시를 썼다는 말입니다.
 
그때 시인님은 연희전문학교 문과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으로 올라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 시간을 시인님은 '무서운 시간'이라고 했네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시가 쓰인 해는 일제강점기 속의 1941년입니다. 그것도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극심해지던 시기였고요.
 
일제는 1931년에 만주를 침략해 만주국을 세웠고,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일제는 전시(戰時) 비상체제를 가동하며 우리에게 황국신민화정책을 맹렬하게 강제했습니다.
 
국민징용, 창씨개명, 한글 말살정책, 생필품 배급체제 ···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청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억압의 고통 속에서 징용에 쫓기면서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이렇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에게 외치는 시인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가랑잎 잎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 나 아직 여기 호흡(呼吸)이 남아 있소'
 
'가랑잎'은 국어사전에 '활엽수의 마른 잎'이라는 뜻과 함께 '떡갈나무의 잎'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떡갈나무를 가랑잎나무라고도 하네요.
 
그래서 이 시의 '가랑잎'은 떡갈나무의 잎으로 새깁니다. 떡갈나무 이파리(잎파리)가 푸르러 나온다고 하네요. 
 
연두색 여린 가랑잎이 막 삐져나오는 봄입니다.
 
연두색 여린 가랑잎이 막 삐져나오는 봄 같은 청춘이네요. 25세 청춘요.
 
그런데 그 봄 같은 청춘에 어두운 그림자(그늘)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제 4학년으로 진학하고 그 잎을 활짝 피워야 할 텐데 말입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오롯이 살아온 25년입니다. 그 청춘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에 시달렸겠는지요? 
 
일제에 의해 박제된 삶에 그래도 가느다란 호흡은 남아있다고, 죽음의 그림자에게 이렇게 부르짖네요.
 
'나 아직 여기 호흡(呼吸)이 남아 있소'
 
시인님의 이 목소리는 얼마나 처절한 목소리인지요.
 

"나를 부르지 마오" - 윤동주 시 '무서운 시간' 중에서.

 

 

 

 

3. '하늘'을 잃은 시인이 해야 할 일은?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이런 구절은 우리를 얼마나 애통하게 하는지요.
 
'하늘(나라)'을 잃은, 그래서 '하늘'이 없는 식민지 청년의 처지가 애처롭게 다가옵니다.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였다고 합니다.
 
'나 여기 있어요'라고 제대로 꿈을 펼쳐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상(理想)의 날개를 활짝 펼치지 못하고 희망을 접은 채 웅크리고만 있었다고 합니다.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 나를 부르는 것이오'
 
‘어디에’. 시인님에게는, 아니 '하늘'을 잃은 당대의 조선인에게는 이승과 저승까지도 일제에 의한 억압의 고통으로 꽉 차 있다고 하는 것만 같네요.
 
어디를 가도 한 몸 둘 데 없는 막막한 세상이라는 인식, 어디를 가도 나의 꿈을 펼칠 수 없는 세상이라는 인식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비관과 탄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비전에 대한 시인님의 자각이 꿈틀거리고 있음이 느껴지네요.
 
시인님은 시대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힘없이 살아온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 지금과는 다른, 자신이 가져야 할 양심과 긍지에 대해 생각했을까요?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일'. 이 대목에서 시인님은 앞으로 해야 할 자신의 역할, 시대적 소명을 깨닫게 된 것 같습니다.
 
그 '일'이 어떤 일인지 명시되진 않았지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의 4년 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지기 전까지 시인님이 남긴 뚜렷한 족적은 우리말로 된 시 쓰기였습니다.
 
우리말 쓰기가 억압받던 시간, 그 글 속의 뜻을 일일이 검열받고 신변에 위협을 받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암울한 시간에 시인님의 시 쓰기는 바로 일제에 대한 저항, 식민지의 종속과 압박에서 벗어나려는 민족운동이었습니다. 
 
그런 자신의 '일'을 마치고 죽는다면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일'을 마칠 수 있다면 죽어도 서럽지 않을 것이라고 하네요. 
 
'나를 부르지 마오'
 
그러니 그 '일'을 마칠 때까지 '나를 부르지 마오'라고 합니다.
 
그 '일'을 마치면 기꺼이 가랑잎 떨어지듯 떨어질 테니 '나를 부르지 마오'라고 합니다.

역할을 다한 '가랑잎'에게는 어떤 서러움도 없다는 시인님의 이 말은 얼마나 높고 큰 자유가 품어져 있는 말인지요?
 
'무서운 시간'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을 다시 보게 됩니다. 
 
이승이나 저승이나 질식할 것 같은 죽음과 같은 식민지의 시간에서 시인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 죽음과 같은 결의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을까요?
 
그렇게 앞으로 해야 할 나의 '일'을 자각한 시간, 암울한 시대가 자신에게 요청하는 것을 받아들인 순간, 그 시간은 시인님에게 얼마나 무거운 시간, 또 '무서운 시간'이었을까요?
 
그 같은 시인님의 '무서운 시간'을 생각하며 또한 오늘을 사는 '나의 시간'을 생각해 보는 밤입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윤동주 시인님의 시를 더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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