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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백석 시 시기의 바다

by 빗방울이네 2024.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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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시인님의 시 '시기(柿崎)의 바다'를 만납니다. 우리 마음의 시선을 낮고 낮은 곳으로 데려가주는 따뜻한 시입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시기(柿崎)의 바다' 읽기

 
시기(柿崎)의 바다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저녁밥 때 비가 들어서
바다엔 배와 사람이 흥성하다
 
참대 창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가 께우며 섬돌에 곱조개가 붙는 집의 복도에서는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즉하니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 앓는 사람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
 
어득한 기슭의 행길에 얼굴이 했슥한 처녀가 새벽달같이
아 아즈내인데 병인(病人)은 미억 냄새나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같이 눟었다
 

▷백석 시집 「사슴」(1936년 오리지널 디자인, 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중에서.

 

2. '저녁밥 때'에 항구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시 '시기(柿崎)의 바다'에서 '시기(柿崎)'는 일본의 바닷가 마을 이름입니다. '시기(柿崎)'는 일본말로 가키사키입니다.
 
가키사키는 일본 도쿄 남서쪽 시즈오카현에 있습니다.
 
백석 시인님은 19세(1930년)부터 23세(1934년)까지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에 유학해 영문학을 공부합니다.   
 
그 유학시절, 자신의 거처가 있던 도쿄에서 가키사키로 여행을 하고 쓴 시가 '시기(柿崎)의 바다'네요.
 
20대 초반의 청년 백석이 본, 1930년대 초반 일본의 바닷가 마을 풍경은 어떠했을까요? 
 
'저녁밥 때 비가 들어서 / 바다엔 배와 사람이 흥성하다'
 
저녁 무렵 항구 풍경입니다.
 
비가 내렸고요, 이 비 때문에 항구의 배나 사람이나 바쁩니다.
 
'흥성하다'는 기운차게 일어나거나 대단히 번성하다는 뜻입니다. 
 
날은 저물어 그렇잖아도 마무리 작업하는 손길 발길 다 바쁜 참인데 비까지 내렸으니 어찌 되겠는지요?
 
비에 젖더라도 하던 일을 어서 마무리해야만 하겠네요. 바다에서 잡아온 고기 배에서 내리느라, 그 고기 팔고 사기 위해 흥정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중입니다.
 
사람들이 바삐 오가며 지르는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그 부산스럽고 시끄러운 정경이 생생하게 다가오네요.
 
이 시의 첫 시어, '저녁밥 때'가 정말 정답네요.
 
'저녁 무렵'이나 '저녁에'라고 하지 않고 '저녁밥 때'라고 했네요.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하루의 노동을 마무리해야 하고, 비까지 내리는데 배까지 고프네요.
 
이 첫 구절 속의 풍경은 우리에겐 그저 멀찌감치 내다보이는 항구의 풍경이었을 텐데요, 이 '저녁밥 때'라는 시어로 인해 우리도 모르게 그 풍경 속으로 풍덩 빠지고 말았네요. 저마다의 허기를 가늠해 보면서요.
 
'참대 창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가 께우며 섬돌에 곱조개가 붙는 집의 복도에서는 배창에 고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참대 창'은 대나무(참대)를 뾰족하게 깎아 만든 꼬챙이네요. 거기에 '바다보다 푸른 고기', 즉 싱싱한 고기가 꿰여(께우며) 있다고 합니다.
 
이는 대나무 꼬챙이에 생선을 꿰어 말리는 풍경이네요. 그런데 '창'이라고 한 걸 보면 '참대 창'은 짧은 게 아니라 창처럼 기다란 꼬챙이겠습니다. 그 긴 꼬챙이에 생선들이 꿰어져 있는 아주 이색적인 장면이네요.
 
'섬돌'은 마루로 올라설 수 있게 놓은 돌입니다. 그 섬돌에 '곱조개'가 붙었다고 하네요. 바다에 사는 조개란 녀석이 밀려와 섬돌에 붙을 정도니 그 집이 얼마나 바다와 가까운 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네요.
 
'배창'은 배의 갑판 아래에 있는 창고입니다. 집이 그렇게 바다와 가까우니 선원들이 잡은 고기를 보관하기 위해 갑판 위에서 배창(배의 갑판 아래에 있는 창고)으로 떨어뜨리는 소리가 다 들린다고 하네요.
 
이 구절까지 읽고 나니 무언가 애잔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네요. 어촌 마을의 가난과 애환이 갯비린내와 함께 바람에 묻어오는 것만 같습니다.
 

"저녁밥 때" - 백석 시 '시기(柿崎)의 바다' 중에서.

 

 

 

3. 흥성거리는 항구의 이면에 '보이지 않는 아픈 삶'에 대하여

 
'이즉하니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에서 저녁상을 받은 가슴 앓는 사람은 참치회를 먹지 못하고 눈물겨웠다'
 
'이즉하니'는 '이슥하니'로 새깁니다. 첫행('저녁밥 때 비가 들어서')에서 시작된 비로 인해 시간이 지나면서(이슥하니) 주위가 다 습기로 눅눅해진(누굿이) 저녁입니다.
 
'왕구새자리'는 왕골로 짠 삿자리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일본집에서 방바닥에 까는 '다다미'로 새깁니다. 
 
이 해변마을에, 곱조개가 섬돌에 붙을 정도로 물가에 지어진 집에 '가슴 앓는 사람'이 시에 불쑥 등장했네요.
 
그는 가난한 어부였을까요? 이 구절에서 어쩐지 뱃일의 힘겨움이 느껴집니다. 먹고살기 위해 미처 몸을 사리지 못했던 고된 노동 끝에 불행하게도 병마가 찾아왔을까요? 그것도 이 극복되지 않는 가난 속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저녁상에 올라온 참치회도 먹지도 못하고 밥상을 물리고 있네요.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 위에서 말입니다.
 
우리도 '물기에 누굿이 젖은 왕구새자리'에 앉은 듯 몸도 마음도 눅눅해지네요. 애틋해지네요.
 
'어득한 기슭의 행길에 얼굴이 했슥한 처녀가 새벽달같이 / 아 아즈내인데 병인(病人)은 미억 냄새나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같이 눟었다'
 
'가슴 앓는 사람'에 이어 또 한 사람이 시에 등장했습니다. '처녀'입니다.
 
그것도 '얼굴이 해쓱한(했슥한) 처녀'라고 합니다. 얼굴이 해쓱하다는 말에 가난의 냄새가 풀풀 나는 것만 같고요.
 
'어둑한(어득한) 기슭의 행길'에 등장한 이 처녀가 '새벽달' 같다고 합니다.
 
새벽의 차가운 기운, 그리고 아직 어둑하고 아무도 없는 하늘에 홀로 뜨는 새벽달의 외로움이 물씬 풍겨옵니다.
 
지금은 저녁인데, 행길에 서 있는 처녀가 새벽달같이 차고 외로워 보였다고 하네요.
 
이 처녀, 우리가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드네요.
 
백석 시인님의 시 '통영'에서 만난 적이 있어요.
 
그 시에 낡은 항구에는 '미억오리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시 사랑하다 죽는다는'(시 '통영' 중에서) 처녀가 많다고 했습니다.
 
가난한 항구의 처녀들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못하고 돈 많은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가고 싶어한다'(또 다른 시 '통영' 중에서)라고 했네요. 가난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이 시기 시인님에게는 항구의 가난한 처녀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던가 봅니다.
 
다시 '시기(柿崎)의 바다'에 나오는 처녀로 옵니다.
 
'병인(病人)'은 이 처녀의 아버지일까요?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야 할 텐데, 자신이 아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난한 어부 말입니다.
 
그 처녀는 그런 가난한 아버지의 딸일까요? 어떻게든 돈을 벌어 '가슴을 앓는' 아버지를 치료해야 할 텐데요,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어쩔 도리가 없어 행길에 나와 발만 동동 구르는 얼굴 파리한 자식 말입니다.
 
'아 아즈내인데 병인(病人)은 미억 냄새나는 덧문을 닫고 버러지 같이 눟었다'
 
'아즈내'는 '초저녁'의 방언입니다. 자신과 딸의 비극적인 처지를 생각하니 병인(病人)은 이렇게 덧문을 닫고 초저녁인데도 자리에 몸져누울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겠습니다. 딸이 저녁으로 차려준 참치회도 몸이 아파서 못 먹고 말입니다. 희망이 없는 그 눅눅한 절망의 '왕구새자리'에 말입니다.
 
'버러지 같이'.
 
이 마지막 구절은, '바다엔 배와 사람들이 흥성'한 항구의 이면에는 이처럼 벌레같이 소외되어 아무도 모르게 팽개쳐진 아픈 삶이 있다는, 병인(病人)을 향한 시인님의 비통한 탄식일까요?
 
비가 온 뒤라 미역냄새는 더 진하게 나는 것 같고요, 초저녁에 자리에 몸져눕는 병인(病人)의 한숨소리, 앓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네요.
 
그 가난한 냄새를 맡고 그 애통한 한숨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시인님의 낮고 따뜻한 마음을 느껴보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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