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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유치환 박쥐

by 빗방울이네 2023. 1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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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시인님의 시 '박쥐'를 만납니다. 이 시는 절망 속에서도 날개를 길러 꿈을 펼치려는 청년 유치환 님의 각오가 스며 있습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유치환 시 '박쥐' 읽기

 
박쥐
 
- 유치환(1908~1967, 경남 통영)
 
너는 本來 기는 즘생.
무엇이 싫어서
땅과 낮을 피하야
음습한 廢家의 지붕밑에 숨어
파리한 幻想과 怪夢에
몸을 야위고
날개를 길러
저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서
호을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
 

- 유치환 시집 「靑馬詩鈔」(초간 희귀 한국현대시 원본전집, 문학사상사 자료조사연구실 엮음, 한성도서 발행, 1975년) 중에서

 

2. 첫시집의 첫시로 '박쥐'를 배치한 까닭

 
한국 근대문학사의 큰 나무로 꼽히는 청마 유치환 시인님의 첫시집 첫시가 '박쥐'입니다.
 
1939년 발간된 첫시집 「청마시초(靑馬詩鈔)」는 첫시 '박쥐'에 이어 '고양이' '아기' '깃발' '그리움' 등의 순으로 실려있네요.
 
시인님의 첫시집 첫시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윤동주 시인님의 유일한 시집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의 첫시는 '서시'입니다. 서정주 시인님의 첫시집 「화사집」의 첫시는 '자화상'이고요.
 
이처럼 첫시는 시인님마다 '시의 길' '삶의 길'에 대한 마음이 스며 있습니다.
 
시집 발간 연도(1939년)를 보면, 유치환 시인님의 시 '박쥐'는 시인님 20대에 쓰인 시로 보입니다. 이 시에는 유치환 시인님의 어떤 마음이 스며 있을까요? 
 
너는 본래 기는 즘생 

- 유치환 시 '박쥐' 중에서

 
'박쥐'는 새일까요, 쥐일까요? 새도 쥐도 아닌 전혀 다른 종류, 박쥐목으로 분류된 동물입니다. 포유류 중에서는 유일하게 날아다니는 동물이고요.
 
박쥐라는 이름은 '눈이 밝은 쥐'에서 나왔다 합니다. 현대 과학으로 밝혀진 사실은 시력보다는 초음파를 발사해 곤충을 발견하고 포획하지만 그것을 몰랐던 옛날에는 박쥐가 밤에도 먹이를 잘 잡고 잘 다니니까 눈이 밝다고 생각했겠네요.
 
밤에만 다니는 야행성에다 쥐 같기도 새 같기도 한 모습의 박쥐. 땅의 존재이면서 천상의 세계를 지향하는 듯한 박쥐. 이같은 박쥐의 양면성을 보며 시인님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무엇이 싫어서 / 땅과 낮을 피하야 / 음습한 폐가(廢家)의 지붕 밑에 숨어

- 유치환 시 '박쥐' 중에서

 
땅의 존재이면서 땅을 피해 지붕 밑에 달려 있고, 대부분의 생명이 활발히 활동하는 낮을 피해 밤에 움직이는 박쥐입니다. 
 
시인님은 묻습니다. 무엇이 싫어서 그렇게 사느냐고요.
 
이렇게 박쥐에세 질문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여기서부터 슬며시 시인님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되네요.
 
이 시가 나온 시대는 일제 강점기입니다. 일제의 폭압에 고통받던 시간입니다.
 
박쥐의 양면성에 시인님 자신을 투영하고 있네요.
 
식민지 아래의 고통스러운 삶, 그런 일제의 압제에 제대로 맞서지 못하고 '지붕 밑에 숨어' 사는 힘없는 지식인의 좌절과 절망. 그런 자신을 직시하는 일은 청춘 유치환 님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요?
 

유치환시박쥐중에서
유치환 시 '박쥐' 중에서.

 

 

3. '호을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

 
파리한 환상(幻想)과 괴몽(怪夢)에 / 몸을 야위고

- 유치환 시 '박쥐' 중에서

 
일제에 항거해 목숨을 던지지도 못하면서 지식인의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님.
 
그러나 식민지의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비명을 못 보고 못 들은 체 박쥐처럼 숨은 형국이니 이런 자신을 어찌 용납할 수 있었을까요?
 
절망과 자괴, 치욕 속에서 온갖 환상과 괴상한 악몽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몸이 야위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시인님은 이대로 주저앉았을까요?
 
날개를 길러

- 유치환 시 '박쥐' 중에서

 
이 구절은 이 시의 솟대입니다. 
 
온갖 좌절 속에서도 날개를 기르겠다고 합니다.
 
박쥐에게 날개는 '기는 짐승'에서 '나는 짐승'으로 상승하는 수단입니다. 시인님에게 날개는 현실의 옥죄임에서 벗어나 자유의 꿈을 펼치는 수단입니다. 그것은 정신을 닦는 일, 고결한 이상과 예술혼으로 자신을 펼치는 일일 것입니다. 
 
저 달빛 푸른 밤 몰래 나와서 / 호을로 서러운 춤을 추려느뇨

- 유치환 시 '박쥐' 중에서 

 
그런 '날개를 길러' 춤을 추겠다고 합니다. '저 달빛 푸른 밤'에요. '몰래 나와서' 말입니다. 그것도 홀로요.
 
이런 춤은 참으로 서러운 춤이겠습니다. 자신의 춤을 보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아무리 서러운 춤일지라도 춤을 추겠다고 합니다.
 
이 시 '박쥐'가 시인님의 첫시집 첫시라는 점을 상기하면, 이 구절은 시인님 자신의 ‘시의 길’ '삶의 길'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시인님은 자신의 첫시집 「청마시초(靑馬詩鈔)」의 맨 앞에 서문인 '序'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 시(詩)는 나의 출혈(出血)이오, 발한(發汗)이옵니다 ···
항상 시를 지니고 시를 앓고 시를 생각함은
얼마나 외로웁고 괴로운 노릇이오며 또한 얼마나 높은 자랑이오리까 ···
시를 쓰고 지우고, 지우고 또 쓰는 동안에
절로 내몸과 마음이 어질어지고 깨끗이 가지게 됨이 없었던들
어찌 나는 오늘까지 이를 받들어 왔아오리까.
시인이 되기 전에 한 사람이 되리라는
이 쉬웁고 얼마 안된 말이 내게는 갈수록 감당하기 어려움을
깊이 깊이 뉘우쳐 깨다르옵니다.

- 위의 같은 책 중에서

 
시를 쓰고 지우고 또 쓰는 시간은 피와 땀의 시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시인님의 몸과 마음이 어질어지고 깨끗해졌다고 하네요. '시인이 되기 전에 한 사람'이 되기 위한 시인님의 각고의 노력이 느껴집니다.
 
시인님은 그렇게 한 편의 시를 위한 외롭고 괴로운 시간을 '序'에서 토로한 뒤 첫시로 '박쥐'를 우리에게 선보이셨네요. 아무리 험난한 길이라도 '날개를 길러' '서러운 춤을'이라도 추며 '나의 길'을 가겠다고요.   
 
이처럼 강인한 마음을 삶의 화두처럼 자신의 서시인 '박쥐' 속에 깊이 각인해 두고, 시인님은 자신이 어질어지고 깨끗해지는,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맑혀주는 주옥같은 시들을 쓰셨네요. '출혈(出血)'이자 '발한(發汗)'으로 불리는 귀한 시편들을요. 

시인님처럼 이 시간에도 날개를 기르고 있는 저마다의 마음을 다독이며 시인님이 빚어낸 별빛 같은 시편들의 첫구절을 음미해봅니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시 '그리움' 중에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 유치환 시 '깃발' 중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

- 유치환 시 '행복' 중에서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유치환 시인님의 시 '그리움'을 만나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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