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시인님의 시 '소년'을 만납니다. 이 시는 순수한 소년의 마음으로 우리를 데려가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순수한 소년이 되게 합니다. 함께 읽으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윤동주 시 '소년' 읽기
소년(少年)
- 윤동주(1917~1945, 북간도)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소년(少年)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 「윤동주 시집 - 그의 시와 인생」(권일송 편저, 청목문화사, 1987년) 중에서
2. 금방 눈물이 핑 돌던 순하디 순한 '윤동주 소년'
윤동주 시인님의 시 '소년'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에 세 번째로 실린 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서시'와 '자화상'에 이어 '소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인님이 대표선수로 꼽은 시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 '소년'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시인님 얼굴을 떠올려봅니다.
연희전문 졸업 때 찍은 사각모를 쓴 사진, 기억나시지요? 미남입니다. 얼굴 전체가 갸름하니 길고 눈동자가 짙고 얼굴만큼 코도 길고 인중의 골은 깊어 뚜렷합니다. 귓바퀴 위쪽 부위가 넓은, 커다란 귀를 가졌네요. 착하고 여린 성격일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을 바라보면서 곰곰이 시인님 소년시절의 모습을 찾아봅니다. 이 사진은 시인님 25세 때입니다. '소년' 윤동주 님을 만나기 위해 이 사진을 10년 전쯤으로 되돌려야겠네요. 아주 잘 생긴 15세 소년이 어렴풋이 보이네요.
시인님은 15세(1931년) 때 고향 북간도의 명동소학교를 졸업합니다. 이 소학교에 9세(1925년)에 입학했고요. 9세에서 15세 즈음, 소학교 시절의 소년 윤동주 님은 어떤 성품이었을까요?
시인님의 명동소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었던 한준명 목사님의 회고입니다.
윤동주는 성품이 아주 순했어요. 너무 어질었지. 그래서 잘 울었고···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지요. 친구가 싫은 소리를 해도 그랬고 ···
하하! 본래 재주 있는 아이였어요.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고요.
그래도 어쩌다 문답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 「윤동주 평전」(송우혜 지음, 서정시학, 2018년) 중에서
어쩐지 그럴 것 같았네요. 누가 조금만 꾸짖으면 금방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여리디 여린 소년이었네요. 이런 소년의 가슴에 소녀가 있었네요. 얼마나 설레었을까요?
우리는 미혼으로 일본 감옥에서 돌아가신 윤동주 시인님은 어떤 사랑을 했을까 하고 궁금해 하지만 이처럼 여리디 여린 소년의 사랑이 버젓이 드러났을 리가 있겠는지요? 누구라도 가슴속에는 어린 시절의 풋사랑이 남아 있으니까요. 그것도 오래오래 말입니다. 평생 동안요.
그런 풋풋한 사랑 간직한 '소년'을 만나볼까요?
3. 청순하고 해맑은 소년의 마음으로!
시 '소년'으로 가는 오솔길은 여러 갈래일 것입니다. 오늘은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로 함께 가보십시다.
여기저기서 단풍잎 같은 슬픈 가을이 뚝뚝 떨어진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
- 윤동주 시 '소년' 중에서
이 시 아래에 '1939년'이라고 적혀있네요. 시인님 23세 때 연희전문 2학년 때입니다. '독서목욕'은 지금 시에 등장한 서정적 자아는 23세의 윤동주 님으로 봅니다. 시 구절로 보아 그 서정적 자아를 소년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풍잎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고 나무가지 위에 하늘이 펼쳐있다'는 인식이 소년에게 어울릴까요?
시인님은 늦가을의 연희전문 교정을 걷고 있을까요? '슬픈 가을'은 시인님의 마음입니다. 가을은 누구에게라도 고독의 스위치 아니겠는지요. 특히 낙엽은 우리를 쇠락의 슬픔 속으로 데려갑니다. 아, 저 단풍잎은 '떨어져 나온 자리마다 봄을 마련해 놓았겠구나'. 얼마나 골똘히 가지를 바라보았겠는지요? 홀로인 자신의 봄을 생각했을까요? 그 가지 위로 파란 하늘이 펼쳐져 있네요.
가만히 하늘을 들여다 보려면 눈썹에 파란 물감이 든다.
- 윤동주 시 '소년' 중에서
이 3행이 이 시의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의 평탄한 두 행을 무심히 지나온 우리는 이 구절에서 심쿵한 나머지 저마다의 눈썹을 쓸어보게 됩니다. 하늘의 파란색이 눈썹에 물든다는 신비로운 상상력은 어떻게 나오게 됐을까요?
그만큼 시인님이 아주 오랫동안 하늘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늘을 들여다보다 끝내 자신도 하늘이 되어버린 걸까요? 어떤 대상에 몰입하면 마침내 그 대상에 합일되는 순간을 느끼게 되는 걸까요? 시인님은 그 파란 하늘에 풍덩 빠져 동화되어 버린 것만 같습니다.
두 손으로 따뜻한 볼을 쓸어보면 손바닥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
- 윤동주 시 '소년' 중에서
두 손을 이마로 가져가 천천히 얼굴을 덮으며 입가로 쓸어내리는 23세의 윤동주 님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파란 물감이 든 눈썹과 얼굴을 스친 손바닥, 거기에도 파란 물감이 묻어난다고 합니다. 그 손바닥을 바라보는 시인님의 눈빛이 젖어있네요.
다시 손바닥을 들여다 본다. 손금에는 맑은 강물이 흐르고, 맑은 강물이 흐르고, 강물 속에는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이 어린다.
- 윤동주 시 '소년' 중에서
앞에서 시인님을 따라 자신도 모르게 눈썹을 쓸어야 했던 우리는 이 행에서는 불현듯 손바닥을 보게 됩니다. 파란 물감이 묻어나는 손바닥 말입니다. 손금이 강물이라니! 손금이 여러 갈래이니 강물도 여러 갈래네요.
그 강물에 시인님 가슴 깊이 간직된 '순이(順伊)'가 비쳤네요. 어릴 적 북간도 명동마을에서 함께 소학교 다니고 교회도 다니던 친구였겠지요? 속으로 좋아했지만 끝내 고백하지 못했던 첫사랑, 순하고 어질고 잘 울었던 내성적인 소년 윤동주 님이 속 깊이깊이 간직한 소녀였네요.
소년(少年)은 황홀히 눈을 감아 본다. 그래도 맑은 강물은 흘러 사랑처럼 슬픈 얼굴 - 아름다운 순이(順伊)의 얼굴은 어린다.
- 윤동주 시 '소년' 중에서
이 시행은 시를 매우 역동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소년이 불쑥 등장했으니까요. 어떻게 등장한 걸까요?
지금까지 우리가 보던 시 속의 영상이 오버랩되었네요. 파란 가을하늘을 바라보고 얼굴을 쓸어내리고, 그 쓸어내린 자신의 손바닥을 쳐다보고, 손금에서 강물을 보고, 강물에서 순이의 얼굴을 떠올리게 된 23세의 시인님의 얼굴이 점점 사라지면서 15세 소년 윤동주 님의 앳된 얼굴로 바뀝니다.
이제 이 시의 서정적 자아는 명동마을 소학교 시절의 소년이 되었습니다. 순이를 떠올리며 황홀히 눈을 감네요. '사랑처럼 슬픈 얼굴'. 사랑과 슬픔은 친구인 것만 같습니다. '자비(慈悲)'라는 말에도 슬픔이 있습니다. 깊이 사랑하면 순수한 슬픔을 알게 되는 걸까요? 그런 참 슬픔은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인지요? 아름다운 소녀 순이를 떠올리는 소년 윤동주 님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것만 같네요.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네요. 시인님도 자신의 소년을 안아주었겠지요?
시의 제목이 왜 '소년'이었을까요?
시인님은 깊고 푸른 가을하늘을 바라보다 아득한 시간의 저편에 있던, 티 없이 앳된 '소년'을 만났습니다. 시인님은 그 소년처럼 맑고 깨끗하게 살고 싶었네요. 언제나 청순하고 해맑은 천사 같은 소년의 마음을 간직하면서요.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다짐하면서요.
그런 다짐이었기에, 자신의 시집에 '서시' '자화상' 다음 세번째로 이 '소년'을 놓아두었던 거네요.
우리는 천진난만(天眞爛漫)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와 버렸는지요? 윤동주 시인님처럼 지금 저마다의 '소년' '소녀'를 불러내 가슴 깊이 안아보십시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윤동주 시인님의 시 '병원'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