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시인님의 시 '청시(靑枾)'를 만납니다. 3행짜리 짧은 시이지만, 우리 삶의 중요한 법칙이 내재되어 있는 시입니다. 함께 음미하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백석 시 '청시(靑枾)' 읽기
청시(靑枾)
▷ 백석(1912~1995, 평북 정주)
별 많은 밤
하누바람이 불어서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즞는다
▷백석 시집 「사슴」(1936년 초판 복원본, 도서출판 소와다리, 2016년) 중에서
2. 3행짜리 짧은 시, '청시'가 말하는 것은?
백석 시인님의 시 '청시(靑枾)'는 3행짜리 짧은 시입니다. 시집 「사슴」에는 모두 33편의 시가 실렸는데, '비'와 '노루'가 각각 2행으로 가장 짧고, '청시(靑枾)'와 '산비'가 각각 3행으로 그다음으로 짧은 시입니다.
과연 무엇을 말하고 싶은 시일까요?
'별 많은 밤 / 하누바람이 불어서 / 푸른 감이 떨어진다 개가 즞는다'
'청시(靑枾)'는 한자로 보아 아직 익지 않은 땡감을 말할 텐데, 국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입니다. 익어서 물렁해진 '홍시(紅枾)'에 대비(對比)하여 만들어진 단어네요.
'하늬'는 서쪽을 가리키는 순우리말로, '하누바람'(하늬바람)은 서쪽에서 불어오는 서늘하고 건조한 서풍을 말합니다. '하늬바람에 곡식이 모질어진다'는 속담은 여름이 지나 서풍이 불게 되면 곡식이 여물고 대가 세진다는 말입니다.
'푸른 감'과 '하늬바람'에서, 우리는 이 시의 계절이 여름에서 막 가을로 접어드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별 많은 밤 / 하누바람이 불어서 / 푸른 감이 떨어진다 / 개가 즞는다'
별이 많은 초가을 밤입니다. 서늘하고 건조한 하늬바람이 부는 별밤이네요. 이 서늘한 바람에 그만 아직 익지 않은 감이 떨어졌습니다. 툭! 하고 감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개가 컹컹 짖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인님, 그래서 도대체 뭐가 어찌 되었다는 말인지요?
3. 원인의 원인으로 무한히 이어지는 자연의 법칙에 대하여
시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오늘은 '독서목욕'이 낸 오솔길을 따라 시 '청시(靑枾)'를 만나봅니다.
'푸른 감이 떨어진다'
'푸른 감'의 낙과(落菓)는 과연 우연일까요?
개가 짖는 것이 우연이 아니듯 '푸른 감'의 낙과도 우연이 아니라고 시인님은 말하고 있네요. 그 앞의 하늬바람이 부는 것도, 별 많은 밤도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우연이 아니니 필연적으로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네요.
그렇습니다. 시 '청시(靑枾)'는 바로 '자연의 법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원인과 원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그런 방식으로 무한히 전개되는 우주의 연쇄작용 말입니다.
그럼, 1행 '별 많은 밤'의 원인은 무얼까요? 계절의 변화입니다. 여름에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시간인 가을로 접어들었으니 공기는 청명해지고 하늘은 높아져 별은 더 총총 했겠지요?
이렇게 1행의 '별 많은 밤'이라는 계절의 변화는 2행의 서늘하고 건조한 '하늬바람'이 불게 된 원인이 되었습니다.
푸른 감은 왜 떨어졌을까요?
여름의 동남풍이 서풍(하늬바람)으로 바뀌니, 그동안 습기 많은 동남풍에 익숙해져 있던, 감나무에 달린 풋감 중에서도 여린 녀석이 서늘하고 건조한 바람에 쓸려 그만 가지를 놓치고 말았네요.
그러므로 이 하늬바람은 3행의 아직 익지 않은 '푸른 감'의 낙과(落果)의 원인이 되었네요. '푸른 감'의 낙과는 물론 개가 짖게 된 4행의 원인이 되었고요.
별이 많은 밤 → 하늬바람 → 푸른 감의 낙과 → 개의 짖음으로 이어졌네요. 각자가 다음 사건의 원인이 되어서 말입니다.
'개가 짖는다'. 이로써 자연의 현상은 끝이 날까요? 물론 아닙니다.
'푸른 감' 떨어지는 소리에 놀라, 한밤에 방앞 섬돌 옆에 자던 개가 컹컹 짖었습니다. 개가 짖는 행위는 다시 다른 행위의 원인이 됩니다.
바로 그것은 방에서 자고 있던 사람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원인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그 연쇄작용을 백석 시인님의 다른 시 '고야(古夜)'의 풍경으로 상상해 볼까요?
개 짖는 소리에 어머니가 잠에서 깨어 '머리맡의 문살에 대인 유리창으로'(시 '고야' 중에서) 누가 왔는지 밖을 내다보았겠지요? '얼빠진 녀석 같으니라고, 감 떨어지는 소리에 놀랐는구먼!' 어머니는 그렇게 개를 향해 낮게 중얼거렸을 지도요.
그 소리에 어린 나도 잠이 깨었습니다. 마침 오줌도 마려웠고요. 그러나 화장실이 있는 문밖은 까만 밤입니다. '조마구 군병의 새까만 대가리 새까만 눈알이 들여다보는 때 나는 이불속에 자즈러붙어 숨도 쉬지 못한다'(시 '고야' 중에서).
그래서 다음날 아침 이불을 흠뻑 적셔 어머니한테 혼나고, 커다란 키를 쓰고 옆집에 소금을 받으러 갔을 지도요. 이를 본 여자아이가 오줌싸개라고 학교에서 놀렸을 지도요.
이처럼 어떤 원인은 다른 행위의 원인이 되고 그 행위는 또 다른 행위의 원인이 되는 방식으로 무한히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원인 없는 일이 어찌 존재하겠는지요?
별밤 → 하늬바람 → 푸른 감 → 개.
시인님은 이렇게 광대무변(廣大無邊)한 우주 공간에 자연의 일부로 살고 있는 우리의 삶도 수많은 원인과 원인들이 연결되어 일어난다는 것을 단 세 줄짜리 시 '청시(靑枾)'를 통해 보여주었네요.
자연에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 아무것도 있을 수 없고
모든 것은 불변의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사물들은 절대 확고한 연결 속에서
확정된 법칙에 따라 일정한 결과들을 산출한다.
▷ 「에티카」(스피노자 지음, 황태연 옮김, 비홍출판사, 2015년)의 '지성교정론' 중에서.
'사물들은 절대 확고한 연결 속에서 확정된 법칙에 따라 일정한 결과들을 산출한다'. 이 빛나는 스피노자의 문장과 백석 시인님의 시 '청시(靑枾)'를 나란히 읽으니, 지금 나의 행동이 어떤 원인이 되어 다른 행위를 불러일으키게 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되네요.
그대는 지금 어떤 원인을 짓고 있는 중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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