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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주요한 시 빗소리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by 빗방울이네 2024.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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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시인님의 시 '빗소리'를 만납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봄비를 볼 때마다 이 구절이 생각나게 되는 시입니다. 함께 음미하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주요한 시 '빗소리' 읽기

 
빗소리
 
주요한(1900~1979, 평양 출생)
 
비가 옵니다.
밤은 고요히 짓을 버리고
비는 뜰 우에 속삭입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으지러진 달이 실낱 같고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
따뜻한 바람이 불더니
오늘은 이 어둔 밤을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다정한 손님같이 비가 옵니다.
창을 열고 맞으려 하여도
보이지 않게 속삭이며 비가 옵니다.
 
비가 옵니다.
뜰 우에 창 밖에 지붕에
남모를 기쁜 소식을
나의 가슴에 전하는 비가 옵니다.
 

▷주요한 시선집 「불놀이」(미래사, 1996년 7쇄) 중에서

 
주요한 시인님(1900~1979)은 평양 출신으로 1919년 김동인 김억 최승만 등과 함께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를 발간, 그 창간호에 '불놀이'를 발표하여 한국 근대시의 선구자, 신시(新詩)의 선구자로 꼽힙니다. 1924년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발간했고, 이광수 김동환과 「3인 시가집」(1929년), 그리고 시조집 「봉사꽃」(1930년) 등을 냈습니다. 
 

2. 한자(漢字)가 없는, 1923년의 아름다운 시

 
시 '불놀이'의 시인으로 잘 알려진 주요한 시인님의 시 '빗소리'를 만납니다. 이 시는 1924년에 발간된 시인님의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에 실린 시입니다.
 
「한국 현대시 원본 전집」을 통해 시인님의 이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잠시 둘러볼까요? 
 
시집 제목 「아름다운 새벽」이라는 글자 위에 '요한 시집'이라고 적혀있는 점이 눈에 띄네요. 제목 아래에는 '1917~1923'이라고 적어두었네요. 그 사이 발표된 시를 묶었다는 말입니다. 
 
'니애기'라는 시가 서시(序詩)처럼 맨 앞에 독립적으로 배치됐고, '나무색이' '고향생각' '힘 있는 생명' '달빛에 피는 꽃' '상해 풍경' '불놀이' 등 6개의 소주제로 나뉘어 모두 66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그리고는 시집 마지막에 '책 끝에'라는 제목을 단, 시인님의 글이 3쪽에 걸쳐 실려 있네요. 첫 시집에 실린 '시인의 말'이니, 시 창작의 지향점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겠지요? 시인님은 어떤 시를 쓰려하였을까요?
 
이는 다만 때를 따라 이는 마음의 파동의 기록입니다 ···
오직 건강한 생명이 가득한, 온갖 초목이 자라나는 속에 있는 조용하고도 큰 힘 같은 예술을 나는 구하였습니다 ···
시가 본질적으로 민중에 가까울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되려면 반드시 거기 담긴 사상과 정서와 말이 민중의 마음과 같이 울리는 것이라야 될 줄 압니다.  

▷주요한 시집 「아름다운 새벽」(한국현대사원본전집)의 주요한 시인의 글 '책 끝에' 중에서.

 
오늘 만나는 시 '빗소리'는 시인님이 지향한 시 세계, 즉 '오직 건강한 생명이 가득한, 온갖 초목이 자라나는 속에 있는 조용하고도 큰 힘 같은 예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시로, 매우 아름다운 시입니다. 
 
시 '빗소리'의 마지막에 '1923년 3월'이라고, 시가 발표된 시기를 적어 두었네요. 시의 원문을 보니 그 당시에는 표준어였을, 옛말로 된 시어들이 정답습니다. 
 
'비가 옵니다' → '비가 옴니다'
'속삭입니다' '속색임니다'
'몰래 지껄이는' →  '몰내 짓거리는'
'지붕에' '집웅에'
 
위의 '책 끝에'에 밝힌 시인님의 문장 중에 시에 담긴 '사상과 정서와 말이 민중의 마음과 같이 울리는 것이라야 될 줄 압니다'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시 '빗소리'는 한자(漢字)가 한 글자도 없는 순수 우리말로 쓰인 1923년의 시, 민중의 마음과 같이 울리는 시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시입니다. 
 
'민중의 마음과 같이 울리는 시', 과연 어떤 울림이 있는 시일까요?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 주요한 시 '빗소리' 중에서.

 

 

3.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울리는 마음의 파동

 
빗방울이네는 주요한 시인님의 시 '빗소리'에서 이 한 구절이 너무 좋습니다.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같이'
 
우리는 이런 시 구절 앞에서 다리가 풀리면서 마음마저 스르륵 내려앉는 것만 같습니다.
 
2연의 '별에서도 봄이 흐를 듯이'라는 구절로 보아 이 시의 '빗소리'는 봄비의 소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봄비 오는 소리가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다고 합니다. 시인님은 자신의 시가 '다만 때를 따라 이는 마음의 파동의 기록'이라고 하였는데, 이 아름다운 '마음이 파동'을 참으로 어찌해야 할까요?
 
첫 시집 원문에는 이렇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몰내 짓거리는 병아리 가치'
 
봄비 오는 소리를 이렇게 표현한 시를 만난 적이 있는지요?
 
병아리는 아기입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아기의 지껄임', 바로 '아기의 말'을 생각합니다.
 
아기의 말, 도대체 그 문장을 알 수는 없지만 그 말의 율동에 따라 우리는 그 아기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모를 리 없습니다. 이렇게요.
 
아기의 말, 엄마에게 품을 열어달라고 조르는 말입니다. 
아기의 말 같은 봄비, 겨우내 얼었던 대지의 엄마에게 가슴을 열어달라고 조르는 말입니다.
땅밑에 숨어 지내는 생명들에게 어서 나오라고 조르는 말입니다.
 
아기의 말, 어리광 부리는 말입니다. 
아기의 말 같은 봄비, 만유(萬有)를 간질이고 적셔주는 순수하고 부드럽고 귀여운 말입니다.
 
아기의 말, 같이 놀자는 말입니다.
아기의 말 같은 봄비, 새싹과 함께 노느라 봄밤 내내 그치지 않는 말입니다.
 
'몰래 짓거리는 병아리 가치'
 
앞으로는 봄비를 만나면 이 구절이 자꾸 떠오르게 될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도 봄비처럼, 병아리처럼, 아기처럼 자꾸 천진난만하게 속삭이게 될 것만 같습니다. '몰래 짓거리는 병아리 가치'.
 
시 '빗소리'의 다른 구절은 읽기만 해도 봄비처럼 다정하게 가슴으로 스며드네요.
 
다만, 1연의 두 번째 행, 이 구절은 어떤지요?
 
'밤은 고요히 짓을 버리고'
 
시 '빗소리'를 현대어로 표기하면서 이 구절은 '밤은 고요히 깃을 벌리고'라는 구절로 그 표기가 바뀌어 읽히고 있습니다. 그렇게 밤은 어미닭처럼 '고요히 깃을 벌리고'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를 품어주는 풍경이 눈앞에 선연하네요.  
 
이렇게 '깃을 벌리고'도 너무 좋지만, 빗방울이네는 이 구절을 글자 그대로 '짓을 버리고'로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입니다. 낮의 온갖 '짓(행위)'이 버려진, 그래서 온갖 짓들이 멈추어진 봄밤의 정취는 얼마나 고요할까요?
 
시인님은 시 '빗소리'에서 '몰래 지껄이는 병아리 같이' '다정한 손님 같이' '남모를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비가 옵니다'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사셨던 시인님에게 '남모를 기쁜 소식'은 민족해방이었겠지요. 
 
그대는 이 봄에 어떤 '남모를 기쁜 소식'을 기다리나요?
 
'비가 옵니다'를 '기쁨이 옵니다'라고 바꿔 읽으며 가만히 밖을 향해 귀를 기울여보는 봄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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