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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스미기

김남조 시 목숨 읽기

by 빗방울이네 2023.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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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인님의 시 '목숨'을 만납니다. 목숨이 목숨이 아닌 시간, 시인님은 목숨만은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시인님의 시를 읽으며 목숨의 경이로움과 소중함을 생각하며 마음을 맑히는 독서목욕을 하십시다.


1. 김남조 시 '목숨' 읽기

 
목숨
 
- 김남조(1927~2023, 경북 대구)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는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반만 년 유구한 세월에
가슴 틀어박고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어 숨져간
이 모두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罰族)이더라도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 「김남조 시선집」(편집위원 오세영 최동호 이숭원, 국학자료원, 2005년) 중에서

 

2.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남조 시인님의 시 '목숨'은 시인님의 첫 시집 「목숨」에 실린 시입니다. 시의 제목이 시집의 제목이 되었네요. 그만큼 이 시를 시인님이 소중히 여긴다는 뜻이네요.
 
시집 「목숨」이 1953년에 나왔으니 이 시 '목숨'은 시인님 20대 후반에 쓰인 시네요. 그 당시 한반도는 전쟁의 시간이었고, 시인님도 고스란히 그 처절한 전쟁을 온몸으로 건너온, 상처투성이 꽃이었겠습니다.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한 / 산과 가축과 신작로와 정든 장독까지

- 김남조 시 '목숨' 중에서


한국전쟁(1950.6.25~1953.7.27)으로 수백만명의 목숨이 허공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목숨이 허공이 되고 말았는지 정확한 수치도 잘 모를 정도입니다. 
 
'아직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전쟁의 참상을 떠올리니 이 첫 행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없는 시간이었겠습니다. 목숨의 존엄은 어딘가에 가벼이 버려지고 말았습니다. 풍전등화 같이 된 목숨은 '꼭 눈을 뽑힌 것처럼' 불쌍하다고 합니다. 눈을 뽑힌 고통,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절망이 느껴집니다. 온 산하(山河)가 전쟁으로 피투성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어찌 과거의 이야기만이겠는지요? 도심의 거리에서 또는 바다 위에서 얼마나 많은 목숨이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요. 지금도 중동의 열사의 나라에서는 전쟁의 비극 속에 아깝고 아까운 수많은 목숨이 허공이 되고 있습니다. '목숨을 목숨이라고 할 수' 없는 시간, 이 비통하고 안타까운 현실을 우리는 어찌해야 할까요?
 
누구 가랑잎 아닌 사람이 없고 / 누구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없는 / 불붙은 서울에서
금방 오무려 연꽃처럼 죽어갈 지구를 붙잡고 /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 기도를 올렸습니다

- 김남조 시 '목숨' 중에서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서울이 불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포탄이 사방에서 터지고 가족이, 친구가, 이웃이 다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때 조그만 바람에도 날아가버릴 가랑잎 같은 연약한 목숨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겠습니다. 하느님, 부디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살면서 배운 가장 욕심 없는' 기도였겠습니다. 무엇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 행복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이 주신 목숨이니 주신 그대로 이를 지킬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김남조시목숨중에서
김남조 시 '목숨' 중에서.

 

 

3. '죽지만 않는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반만 년 유구한 세월에 / 가슴 틀어박고 / 매아미처럼 목태우다 태우다 끝내 헛되이 숨져간
이 모두 하늘이 낸 선천의 벌족(罰族)이더라도 /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그래도 죽지만 않는 /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 김남조 시 '목숨' 중에서

 
신이시여. 그 소중한 목숨을 한갓 헛되이 잃고 마는 이 전쟁은 정녕 우리 민족이 나면서부터 가진 원죄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 벌을 받겠습니다. 대신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어느 산과 들에 돌멩이처럼 뒹구는 삶일지라도 ‘죽지만 않는 목숨’을 지니게 해 주십시오!
 
참으로 애통하고 간절한 소망입니다. 온갖 고난과 역경 속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살 수만 있다면, 목숨만 부지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토록 처절하게 목숨을 원하는 시를 읽고 나니 잊고 있었던 목숨에 대한 경외심을 떠올리게 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제 숨진 목숨이 간절히 원했던 시간이라는 문장이 떠오릅니다. 시인님의 시 '목숨' 덕분에 목숨의 소중함과 경이로움,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도 함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의 시인'으로 불리는 김남조 시인님은 2023년 10월 10일 향년 96세의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시인님은 첫 시집 「목숨」 이후 30여 권의 시집, 1,000편 이상의 시를 남겼습니다. 시인님은 가셨지만 우리는 이 보석 같은 시들을 조금씩 음미하면서 오래오래 시인님의 사랑을 느낄 것입니다. 시인님의 명복을 빕니다.
 
글 읽고 마음 목욕하는 블로그 '독서목욕'에서 김남조 시인님의 시 '생명'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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